지속 가능한 미래 가치를 위한 현 시대 기업의 포용적 역할 - 2024년 10월 30일 대전
아눅 그레뱅 Anouk Grevin
모두 안녕하세요!
이번 포럼을 조직하기 위해 수고하신 성심당 임선 이사를 비롯해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와 EoC 국제위원회의 모든 멤버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많은 저명하신 참가자분들을 만나뵙게 되어 이번 초대에 대해 매우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저는 지난 2019년에 대전에 오면서 크나큰 기쁨을 누린 적이 있고, 제 마음의 한 부분을 이곳 대전에 두고 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 국민들의 능력과 결단력에 깊이 감동을 받은 바 있습니다. 저는 이 국민들의 특별한 힘과, 원칙을 실천하는 능력을 보았는데, 이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의 나라인) 프랑스에서는 사유하는 것을 매우 사랑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경우는 매우 적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에서 본 것이 인상 깊게 느껴졌고, 여러분이 오늘날 우리의 세상에 그토록 필요한, 경제의 변화와 기업 관행의 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또 다른 동기는 – 다른 많은 분들도 그러하시리라고 믿는데, - 제가 성심당 기업에 매료되었다는 점입니다. 성심당의 경영진들은 EoC의 원칙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크나큰 창의력으로 육화(구체화)시켰습니다. 그에 따른 결실들은 매우 인상 깊게 느껴집니다.
따라서 저는 김미진 이사님과 임영진 대표님, 그리고 EoC 프로젝트를 믿고 따랐으며, 이제는 자신의 나라에서 EoC를 전파하고 있는 모든 한국 기업가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서 대담성과 창의력을 가지시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시라고 격려해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오전에 저는 EoC가 무엇인가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특히 그러한 EoC의 경험에 의해 영감을 받은 기업들이 오늘의 세상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EoC는 우리 인류를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버리는 빈곤과, 변명의 여지 없는 불평등의 사례들로 인해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실에 대응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래전이었던 1991년 5월의 그 당시, 끼아라 루빅이 브라질에 도착했을 때, 크나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그 모습을 오늘날 아직도 우리의 TV화면들에서 보게 됩니다. 이미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 각지의) 우리의 도시들의 초현대적인 초고층 건물들이 인류 진보의 특별한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것에 비해, 매일 여러 어린이들과 남녀 어른들이 굶주림과 전쟁,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계속 죽어갑니다...
어떻게 우리는 많은 인간 존재들을 외곽으로 소외시켜, 비참한 삶에 남아 있도록 버려두면서, 기술적인 진보 혹은 경제적인 진보를 위한 우리의 달음박질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엄청난 불합리성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고통이 끼아라 루빅과 그녀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단기적이지 않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해답들을 찾도록, 그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즉, 불명예스럽고 배척을 가져오는 빈곤의 경험으로 인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생존하기 위해 매일 투쟁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지 않고, 그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에 관련된 것들을 알고 있고, 매일 이것에 관련된 이미지들을 보곤 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빈곤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그 빈곤을 겪는 사람들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우리의 TV 뉴스에만 나오는 사람들일 뿐인가요? 아니면 우리는 그들을 인류 안에서의 형제자매들로 느끼고 있나요? 나는 그들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할 수 있나요?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그 부르짖음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다시 울려퍼지게 할 수 있나요? 이러한 발걸음을 하지 않고서는, 오래 지속되는 포용도 있을 수 없고, 우리 경제의 질병들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형태의 빈곤들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우리 식탁의 한 자리를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취약한 여건들에 처해 있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필요로 하는 첫 번째 것입니다. 곧, 그들을 환대해 주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며, 그들에 대해 걱정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들을 뒷받침해 주고, 그들을 격려해 주며, 그들을 다시 신뢰해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들 역시 무언가 내어줄 것이 있는 사람들이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매우 주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단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역시 내어줄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아닐 때, 그 사람은 하나의 폐기 처분된 존재, 하나의 폐품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힘주어 우리에게 상기시키십니다.
EoC는 어려움 중에 있는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 전 세계 각지의 수백 명의 기업가들을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많은 단절들로 인해 파편화된 우리의 사회를 다시 통합하려면, 우리가 서로 만나야 하고, 우리 서로가 형제자매들임을 재발견해야 하며, 함께 ‘친교와 나눔’(communion)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체험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EoC는 보여줍니다.
그런데 ‘친교와 나눔’(communion)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태리어로) 이 ‘꼬무니오네comunione’라는 말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영어로는 ‘커뮤니언communion’). 이 용어의 어원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통적임’을 뜻하는 이태리어 ‘꼬무난짜comunanza’의 개념, 곧 감정들이나 생각들의 긴밀한 공유, 깊은 합의, 공동체 등의 개념뿐만 아니라, 일치, 상호적인 참여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 ‘상호적인 참여’라고 하는 용어야말로 아마도 가장 강도 높은 용어이자, 제가 보기에는 ‘꼬무니오네comunione’, 즉 ‘커뮤니언communion’의 경험을 보다 잘 표현해주는 용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연히 구분해야 할 것을 계속 구분하고, 사람들의 존엄성을 계속 존중해 주면서도, 우리가 함께 공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이 어떤 의미에서는 내 안에 현존하게 되고, 나는 그 안에 현존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서로 일치하게 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빈곤은 이제 더 이상 익명의, 알려지지 않은 대중들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친숙한 얼굴이 되고, 이 얼굴이 내 안에 살고, 나의 선택들을 이끌어 주게 됩니다. 경제 자체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모든 이가 존엄성을 지니며 살고 공동선共同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공동의 집을 운영하는 경제 자신의 소명을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EoC는 무엇보다 먼저 경제 프로젝트이거나 기업들의 하나의 네트워크가 아닙니다. 혹은 경영의 한 스타일이거나, 하나의 철학이 아닙니다. EoC는 우리를 가장 깊은 내면에서 변화시켜 주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EoC는 다른 사람들과의 하나의 만남입니다. 가장 궁핍한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이로써 이 궁핍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한 자매가 되고, 한 형제가 되며, 우리가 발견해야 할 어떤 풍요로움을 지닌 사람들이 됩니다. EoC는 상호성, 호혜성(reciprocity)에 대한 하나의 경험입니다. 이 상호성, 호혜성 안에서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상대방을 자신 안에 담고 있고 (수용하고 있고), 상대방을 자신 안에 지니고 다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EoC의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은 가장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는 이들과의 만남이 나를 위해, 기업을 위해, 그리고 경제 전체를 위해, 엄청난 풍요로움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 세계에서 배척받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들을 나와 동등한 사람들로 환대해주고, 그들과 더불어 상호성, 호혜성(reciprocity)의 경험과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경험을 경제의 심장부 자체 안에서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EoC의 정신을 공유한다는 것은 결코 이보다 덜한 것이 아닙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그 결과로 뒤따라옵니다. 그러므로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경제, EoC는 기업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하나의 여정이자, 각자가 전적인 자유 안에서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삶의 방식,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고 나서, 오늘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기업들의 역할에 특히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기 위한 것임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EoC 기업가들이 33년 전부터 자신들의 회사에서 실천하고자 해온, 이러한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경험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 관찰해보면, 오늘날의 빈곤의 얼굴들이 다방면에 걸쳐 있고 다양하듯이, 지나온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여정 역시 다방면에 걸쳐 있었고, 다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업가적인 창의성이 지닌 아름다움입니다.
이미 1991년 5월에 끼아라 루빅은 가능한 해답들의 세 가지 주요 유형들인 세 가지 길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길은 종종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포용’의 길, ‘창출된 가치의 공유’라는 길, 그리고 ‘주는 문화’(the culture of giving)의 확산이라는 길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 길을 하나씩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배척’이라는 충격과 논란에 대한 첫 번째 해답은 ‘포용’입니다. 특히 이 포용은 생산적인 포용을 의미하는데, 다시 말해서 취약한 여건들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기업에 받아들여서, 그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또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EoC에 참여한 몇몇 기업가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많은 일자리를 최대한 창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처음에 자신들이 상상했을 법한 정도보다 더 많이 그들의 기업을 발전시키도록 이끄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몇몇 기업가들은 기업 활동의 여건이 허용할 때면, 그다지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은 직원들이나 취약한 상황의 직원들을 고용하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근로자들을 뒷받침해주고 교육시키며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회사에 커다란 도전과 부담이 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고용 기준을 우선순위에 두었던 몇몇 EoC 기업가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천부적 재능과 창의성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포용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잠재력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oC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많은 기업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보다 보조적인 경영의 한 유형을 개발한 바 있습니다. 그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기획 과정과 제품 생산 과정에서, 또 때로는 경영과 거버넌스(governance, 총체적 관리 시스템, 지배 구조)의 과정에서 자율성과 책임을 공유할 수 있게 했습니다.
많은 경영자들은 그들의 직원들이 자신들도 한 가족의 일원이라고 느끼기에, 그 기업의 가장 훌륭한 홍보 대사들이 된 점을 발견하면서 놀랐습니다. 직원들은 경영진이 진정으로 자신들에 대해 걱정해 주고 있고,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할 기회, 인격체로서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깊이 고마워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직원들도 많이 내어주곤 합니다. 몇몇 기업들은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직원들의 노력 덕분에, 혹은 직원들의 좋은 태도에 매료된 고객들 덕분에 되살아난 바 있습니다.
두 번째 행동 노선은 창출된 가치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경제, EoC의 기업가들은 가장 취약한 이들을 위해 포용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조직 전체를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극히 강력한 제스처를 실현하기도 합니다. 즉, 그 기업이 부富를 창출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므로, 그들은 창출된 가치를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 경우에도, 공유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곧, 실현된 이윤의 전부 또는 일부를 기부하는 것, 혹은 직원들이나 가정들, 고객들이나 납품업자들, 주변 관할 지역을 지원하기 위한 투자를 통해, 그 조직의 심장부 자체 내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이나 공동체적인 프로젝트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윤들이나 생산품들을 내어주는 것을 선택하는 EoC 기업가들에게는 이것이 단 한 번만의 자선 활동의 제스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빈곤과 접촉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직접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을 찾아내곤 합니다. 몇몇 기업가들은 수백 개의 협회들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나 그 이상의 프로젝트들 안에서 항상 개인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곤 합니다.
EoC 기업가들이 가장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집중시키는 것을 선택한 기업들은, 물론 다른 많은 사회적 기업들과 유사합니다. 사실 이런 기업들은 사회적 경제 내지 연대적인 기업들, 책임감 있는 자본주의, 혹은 사회적 기업가 정신이라는 커다란 범주에 속해 있습니다. 이 기업들을 구별시켜 주는 것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관계하는 모든 이들과의 ‘친교와 나눔’(communion), 무엇보다 특히 배척받은 이들과의 ‘친교와 나눔’(communion)을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포용’ 및 ‘가치의 공유’와 함께,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경제, EoC의 세 번째 영역으로 데려가줍니다. 이는 하나의 경제 시스템을 정말로 바꾸기 위해서는 그 결과들에 대해서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장 깊은 토대들에도, 무엇보다 특히 그 토대들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는 부富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부富를 갖고 있지 못한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서, 점점 더 자신의 그 부富를 증가시키도록 부추기는 ‘갖는 문화’(the culture of having)와 축적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많은 빈곤의 바탕이 되고 있는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경제를 다른 바탕들 위에 재건해야 합니다. 즉, ‘주는 문화’(the culture of giving),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문화’, 그리고 ‘호혜성과 상호성(reciprocity)의 문화’라는 바탕 위에 재건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러한 문화를 자신의 삶의 방식,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이 되게 함으로써, 이 문화를 살고 확산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업의 경영자들은 특별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자신의 기업을 ‘친교와 나눔’(communion)을 체험하는 장소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친교와 나눔’을 사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활동의 모든 측면에서 이를 실천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가 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들은 ‘주는 문화’(the culture of giving)를 확산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제가 성심당과 같은, 이러한 기업들 중의 몇몇 기업들에 대해 연구했을 때, ‘주는 문화’(the culture of giving)를 전하고, 이 문화가 진정한 고유의 조직 문화가 되게 하기 위해 그 기업들의 경영자들에 의해 고안된 도구들을 보면서, 매우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도구들이 그들 조직의 관행들을 그토록 근본적이고도 철저한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경영 시스템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직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 안에서, 고유한 가치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연구한 EoC 기업들의 경영자들이 그것을 해낼 수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그 효과들은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광범위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주는 문화’(the culture of giving)는 주주들(stakeholder)에게로, 또 주변 공동체들로 확산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우리로 하여금 숙고하고 행동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듯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을 여러분에게 제시해 드리고자 합니다.
- 나는 어떠한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근본적인 경험을 살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친교와 나눔’(communion)의 근본적인 경험이 오늘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선물로 내어줄 힘을 주고, 어려움들 앞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가?
- 나는 아직 오늘 어디에서 가난의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친교와 나눔’(communion)을 체험할 수 있는가? 그들로부터 나는 무엇을 받는가?
- 이러한 경험들이 경제에 관련된 나의 선택들에, 혹은 내가 물건들을 구입하는 것에, 또는 내가 나의 (경제적) 자원들을 사용하는 방식에, 그리고 내가 정한 우선순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 오늘 무엇을 공유하는 것이 나에게 보다 큰 기쁨을 주는가? 나는 아직 또 다른 무엇을 줄 수 있다면 내 마음이 기쁘겠는가? 그리고 누구에게?
우리 각자 안에서 우리 자신의 가장 좋은 면을 다시 일깨워줄 수 있는 이러한 질문들을 여러분께 남겨 드립니다. 그러면서 이 여정에서 혼자 계시지 말라고 당부드리고, 이러한 경험들을 함께 나눌 공간들을 발견해보시라고, 그리고 그 공간들에서 우리 각자가 부름을 받은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한 힘을 얻으시라고 제안 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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