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의 경제(Economy of Francesco) 모임 참가자들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비디오 메시지
국제 온라인 이벤트
“프란치스코의 경제(THE ECONOMY OF FRANCESCO) – 젊은이, 헌신, 미래(YOUNG PEOPLE, A COMMITMENT, THE FUTURE)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2020년 11월 19일-21일
프란치스코의 경제(Economy of Francesco)모임 참가자들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비디오 메시지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그곳 아씨시에 와 있어서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해온 그 모든 일에 대해 감사하고, 프로그램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분이 노력해온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서 성찰을 해왔고, 또 어떤 자질과 진지함, 어떤 책임감을 지니고 이 대회를 준비해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는 것, 여러분으로 하여금 걱정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는 것, 또 여러분으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도록 촉구하는 것 중에 그 어느 것도 소홀히하지 않았습니다.
본래의 계획은 우리가 아씨시에서 함께 만나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따라 영감을 얻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산 다미아노의 십자고상을 통해, 또 나환우의 얼굴 등 다른 얼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를 만나러 가셨고, 그를 부르셨으며, 그에게 한 가지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를 고립시키곤 하던 우상들과 “늘 이런 방식으로 해왔잖아.”라고 하는 통상적인 나약함, – 이것은 하나의 나약함입니다! – 이런 나약함 속에 그를 가두곤 하면서 그를 마비시키곤 했던 우유부단함을 그에게서 앗아가셨습니다. 혹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달짝지근하고도 불만족한 슬픔을 그에게서 빼앗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찬미의 노래의 음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 기쁨을 표현하는 능력과 자유를 선사해 주셨고,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온라인을 통한 아씨시에서의 만남은 저에게는 도착 지점이 아니라, 우리가 성소聖召로서, 문화로서, 서약으로서 살아가도록 초대를 받은, 하나의 과정을 시작하도록 강력히 권고하고 촉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씨시의 성소聖召
“프란치스코야, 가거라, 가서 나의 집을 고쳐라. 네가 보듯이, 나의 집은 페허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젊은 프란치스코를 움직였던 말씀이었고, 우리 각자에 대한 특별한 호소이기도 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것’을 건설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고, 이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 또 이런 일의 주인공들이라고 느낄 때, 여러분은 “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희망을 줍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모임에 대한 제안을 즉시 받아들인 것은, 여러분이 우리 인류가 이렇게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고 분석하며,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면서까지, 이 모임에 합류하고 대회에 등록하며, 이 서약에 함께한 그 높은 참여도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설명이 요구되는 중대한 문제들을 분별하기 위한 특별한 민감성과 우려를 표명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경제라고 하는 하나의 특별한 관점에서 그렇게 했는데, 경제는 여러분의 연구 분야이자 학습 분야이고, 노동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경제적 서사敍事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의 세계 경제 시스템은 여러 관점에서 볼 때 지속 불가능합니다.”[1]또한 이 경제 시스템은 우리의 자매인 이 땅, 지구, 매우 심각하게 학대받고 있고 약탈되고 있는 지구에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가장 가난한 이들과 배척받는 이들에게도 그렇습니다. 이런 타격은 지구와 가장 가난한 이들이 함께 받곤 합니다. 지구를 약탈하면 많은 가난하고 배척받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가난하고 배척받는 이들은 가장 먼저 이런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고... 가장 먼저 기억에서 잊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흔한 일일 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은 잠시 지나가는 피상적인 ‘소음’보다 훨씬 더 큰 존재들입니다. 이런 소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잠잠해지게 할 수 있고, 마치 감각을 마취시키듯 점점 소음이 안 들리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도시와 대학, 직장과 노동조합, 기업과 운동단체, 공공기관이나 민간기관의 사무실에서, 지혜롭게, 힘을 기울여, 확신을 지니고, 구체적으로 큰 영향을 주도록 여러분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로써 (경제 정책의) 주제와 패러다임을 정교하게 다듬고 결정하는 그 핵심부에까지, 그 심장부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2]
이 모든 것이 이 서약을 실현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더욱더 뚜렷이 드러난 현재의 심각한 상황은, 사회의 모든 관계자들, 즉 우리 모두로 하여금 책임감 있는 의식을 갖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여러분 젊은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 맡겨져 있습니다. 곧, 우리들의 행위나 결정이 가져올 결과들은 당사자인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현재와 미래를 낳아주는 공간의 바깥에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참여하든가, 아니면 마치 역사가 여러분 위로 그냥 지나쳐 가듯, 역사와 동떨어진 삶을 살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새로운 문화
우리는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원합니다. 우리는 변화를 추구합니다.[3]문제는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어려움들로 인해, 우리가 적절하고도 포용적인 해답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우리가 감지할 때 생겨납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러 분석과 진단을 하는 과정에서 파편화 현상에 영향을 받게 되고, 이는 결국 모든 가능한 해결책을 막아 버리는 결과가져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지배적인 논리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해 주는, 그러한 유형의 사상, 정치, 교육 프로그램, 영성도 담긴 다양한 비전들이 열릴 수 있도록 허용해주고 장려해 주는 데 필요한 문화가 부족합니다.[4]
해답을 찾아내는 것이 시급하다면, 문화를 정교하게 다듬고, 이러한 과정들에 착수할 수 있는 리더 그룹들이 자라나게 하고 지탱해주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 여러분, 이 말을 잊지 마세요. ‘과정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이 리더 그룹들은 – 여정을 설계하고, 지평을 넓히며, 소속감을 창출해냅니다...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를 운영하고 돌보며 개선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의미 있는 노력이 되고자 한다면, “오늘날 사회를 지탱해 주는 생활방식들과 생산 및 소비의 모델들, 권력으로 공고해진 조직 구조들”[5]을 바꿀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하지 않고서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공공기관들의 지도자들이 문제에 갇혀 있거나 자신의 불만족에 갇혀 있는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그 문제를 스스로 짊어질 수 있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이데올로기들의) 특정 논리들에 – 종종 무의식적으로 - 굴복하여 결국 불의 앞에서도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고 모든 행동을 마비시키는 행태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에 관한 문제를 얼마나 잘 통찰하고 계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굶주림은 물질적인 결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자원의 결핍, 그중에서도 특히 공공기관과 제도의 결핍에 의한 것입니다.”[6]라고 하신 점입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에게는 미래를 향한 길이 열려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베네딕토 교황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전합니다. 굶주림은 물질적인 결핍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자원의 결핍, 그중에서도 특히 공공기관과 제도의 결핍에 의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자신의 피부로 직접 느끼며 겪고 있는 사회적, 경제적 위기로 인해 현재와 미래가 저당잡히게 됨으로써,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그리고 가정들 전체가 버려지고 배척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공동선(共同善)을 희생해 가면서 특정 부문의 이익에만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공동선(共同善)의 신비에로 [그 정신으로] 다시 어느 정도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여러분이 갈등을 건강하고도 혁신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체험한, 한 가지 실습 방식에 대해 여러분의 동의를 구하면서 강조하고자 합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분은 다양한 고찰들과 중요한 이론적 틀들을 공유하면서 함께 논의해왔습니다. 여러분은 12개의 핵심 주제들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12개의 주제를 각각 ‘빌리지(village)’라고 불렀습니다.) 12개 핵심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토의하며, 실행 가능한 방안들을 발견해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필요한 ‘만남의 문화’를 삶으로 살았습니다. 만남의 문화의 반대말은, 현재 유행 중인 ‘쓰고 버리는 문화’입니다. 이러한 만남의 문화는 많은 목소리들이 한 테이블 주위에 나란히 앉아 서로 대화하고, 생각하며, 토의하고, 창조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여기에는 다면적인 전망들과 관점들, 다양한 차원들, 그리고 우리의 여러 민족들과 우리의 여러 민주주의들에 관련된, 전全 지구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이 그 기준점들이 됩니다.[7]
대화 상대가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불신하고 모함하며, 그가 하는 이야기를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놓고 전달함으로써 그 의미를 왜곡할 때, 실제적인 해결 방안들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워지고 마는지요! 이렇게 우리와 생각이 다른 대화 상대를 불신하고 모함하며, 그가 하는 이야기를 본래의 맥락에서 떼어놓고 전달함으로써 그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내가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결정의 책임들을 회피하고 나 자신을 비겁하게 변호하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더 중요하며,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중요하다.”[8]는 것을, 그리고 “개인들의 이익들의 단순한 총합은, 인류 전체를 위해 보다 나은 세계를 낳아줄 수 없다.”[9]는 것을 결코 잊지 않도록 합시다.
그 모든 합법적인 서로 간의 차이들을 넘어 이렇게 서로 만나려고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태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모든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근본적인 발걸음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론적 관점이나 개인적 관점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정신이 없다면, 단지 그 관점만으로는, 위대한 일들에 주력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몇 가지 내적인 동기들, 그리고 한 사람의 행위와 공동체적 행위에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소속감과 ‘뿌리 내리기’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10]
그래서 (이처럼 서로 만나 대화함으로써,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이 태어나게 하는 변화의 과정이 이루어질 때), 미래는 특별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앞에 다가올 도전의 절박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인식하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느끼게 될, 이 특별한 시대는 다음과 같은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줄 것입니다. 먼저 이윤을 척도로 삼아, 이윤만을 당면한 관심사로 여기고 이에 집중하는 경제 모델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이와 유사한 공공 정책들, 곧 고유의 인적 비용(인명의 손실)과 사회적, 환경적 손실 비용을 무시하는 공공 정책들[11]을 추구하는 데 집중하는 경제 모델들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편 제3섹터(the third sector)[12]의 일시적인 완화책들이나 자선활동 모델들을 추구하면서 이에 주력하는 것 역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부문들에서 하고 있는 사업이 대단히 중요하다고는 할지라고, 가장 소외되고 배척받는 이들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고 있는 현재의 불균형의 문제들과 항상 정면으로 맞서, 구조적으로 그 해결 방안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문들은 오히려, 그들이 본래 저항하고자 했던 불의를 영속화하기도 합니다. 비록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사실, 우리의 형제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단지 도와주기만 하거나, 다른 것들은 모두 배제하고 그렇게만 하는 것은 관건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의 모임에 함께 자리잡고 앉아서,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집에 빵을 가져갈 존엄한 권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는 점을, 구조적으로도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복지 시스템을 단지 남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종의 회개와 우리의 우선순위에 있어서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책들과 사회 질서에서 ‘타인’의 자리, 곧 나하고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제 21세기에는 “관건은 더 이상 단순히 착취와 억압 현상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어떤 새로운 문제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배제되고 배척받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 곧 그 소속의 뿌리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배척된 이들은 사회에서 더 이상 최하층 빈민가나 변두리에 있는 이들, 혹은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13]여러분, 이 점에 주의하길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이 배제되고 배척받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 곧 그 소속의 뿌리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배척된 이들은 사회에서 더 이상 최하층 빈민가나 변두리에 있는 이들, 혹은 힘없는 이들이 아니라, 사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쓰고 버리는 문화, 폐기 처분의 문화입니다. 단지 쓰고 버릴 뿐만 아니라, 배척된 이들이 무관심과 안락의 벽 저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폐기 처분된 자신의 삶 속에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문화입니다.
저는 외부와 단절된 채 폐쇄되어 있는 동네를 처음으로 보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저는 그런 동네가 존재하는 줄 몰랐었습니다. 1970년도의 일이었는데, 당시 저는 저희 예수회 수련자들 몇 명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지방에 도착해서 해당 도시로 가려고 할 때, 사람들이 저에게 “안 돼요. 그쪽으로는 갈 수 없어요. 그 동네는 외부와 단절된, 폐쇄된 동네라서 안 돼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외벽도 있었고, 주택들도 있었으며, 도로들도 있었지만, 외부와는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 세계에 대한 무관심 속에 살아가던 동네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런 곳들이 더 늘어났습니다. 더 늘어나고, 더 늘어나고, 또 더 늘어났습니다… …. 결국 이제는 곳곳에 이런 곳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외부와 단절된 채 폐쇄되어 있는 도시 구역과 같나요?”
아씨시의 서약
우리는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계속 뒤로 미루는 것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 거대하고 미룰 수 없는 과제는 문화계에서, 학교 교육 과정에서, 또 학술 연구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낌없이 노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지적인 유행이나 (각기 섬처럼 고립돼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들에 사로잡혀 길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이데올로적 입장들은 우리를 삶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으로부터 분리시켜 고립된 섬처럼 만듭니다.[14]사랑하는 젊은 경제학도, 청년 기업가, 청년 노동자 및 기업 임원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발전과 진보의 모델들과 지속가능성의 모델들을 지지하고 촉진하는 리스크를 무릅쓸 때입니다. 즉, 더 이상 사람들이, 특히 (우리의 자매인 지구를 포함해서) 소외되고 배척된 이들이, (또한 – 기껏해야 – 단지 이름만 있거나, 기술적으로만, 혹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고, 사회관계의 구조 전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뿐인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난한 이들, 소외되고 배척된 이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 우리는 그들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생각하도록 합시다. 여러분, 계몽주의의 유산, 계몽된 엘리트들의 유산을 상기해 보도록 하세요. 그들은 모든 것을 민중을 위해 한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민중과 함께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그들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제 모델들이 발전되도록 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우도록 합시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매우 명확하고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듯이, 조직 구조와 의사 결정 방식에 관한 기본틀을 잡는 설정은 인간의 통합적인 발전 정도에 따라 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경제는 “기술만능주의의 능률에 집착하는 규칙과 패러다임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공동선(共同善)에 대해 생각할 때, 정치와 경제가 대화를 통해 생명에 봉사하도록, 특히 인간 생명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절실히 필요합니다.”[15]
이와 같은 ‘중심적 역할’과 ‘방향 잡기’가 없이는, 우리는 퇴보와 배척, 폭력과 양극화의 동력만을 영속화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멀어지게 할, 악순환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들로 계속 남게 될 것입니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모든 프로그램은, 궁극적으로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의 역할은 불평등을 줄이고, 차별과 싸우며,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 공동의 부(富)를 늘려 그 부(富)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아니오,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이 땅이 사람이 살기에 더 좋은 곳이 되도록 기술을 증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16]이것 역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전인적(全人的)이고 통합적인 인간 발전이 가능하다는 전망은 예언해야 하고, 실현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 그리고 이것은 꿈이 아닙니다. 이것이야말로 길입니다. –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보다 나은 모습을 기초로 하여 인류로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할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예언해야 하고, 실현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꿈으로서 우리가 형제의 짐을, 가장 취약한 형제의 짐을(창세 4,9 참조) 짊어지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성의 척도는 본질적으로 고통과의 관계에 의해, 그리고 고통받는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 인간성의 척도는 그렇게 결정됩니다. - 이는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해당하는 것입니다.”[17]이 척도는 우리의 경제적 결정들과 경제 모델들에도 육화되어야 할 척도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하셨던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다시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지 모릅니다. 그분께서는 복음의 메시지가 인류의 모든 현실들에 스며들고, 그 모든 현실들을 인도하기를 바라시면서 이렇게 쓰셨습니다. “발전이라는 것이 단순히 경제 성장에만 국한되어 그 의미가 축소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발전이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발전이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과 인간성 전체의 증진을 향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 – 모든 인간과 인간성 전체입니다! - . 우리는 경제에 관한 것과 인간성을 서로 떼어 놓고 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발전이라는 것을 그 발전이 접목되어 있는 문명과 분리해서 보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모든 인간, 모든 그룹의 인간들입니다. 이로써, 인류 전체를 이해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18]
이러한 의미에서, 여러분 중에 다수는, 많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거시경제의 결정들에 대응해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러한 결정들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시나리오들 역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마태 10, 16 참조) 준비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사람들은 “여러 나라들이 진보를 증진하는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게, 국민들을 크나큰 빈곤과 배척, 그리고 종속의 메커니즘에 얽매이게 하는, 신용 시스템들(credit systems)에 숨막힐 듯 예속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 나라들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깨어 감시”[19]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오로지 이 같은 신용 시스템들(credit systems)만으로는, 빈곤과 종속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정당한 항의는, 나라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국제적인 연대의 모델을 불러일으키고, 이 모델과 여정을 함께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국제적 연대의 모델은 모든 유형의 예속을 피할 수 있도록 관리 감독하고, 가장 불리한 여건에 처해 있는 나라들과 개발 도상국들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깨어 감시하며 관리하는 메커니즘을 촉진하는 모델이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또 전 세계의 운명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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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서로 형제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크나큰 기회 앞에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를 조장하는 대신, 실패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는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될, 크나큰 기회 앞에 있습니다.”[21]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이미 배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는 자신이 활동하고 결정을 하는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름길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이런 지름길들은 여러분을 그릇된 길로 이끕니다. 즉, 여러분이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지내지 못하게 가로막음으로써, 결국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 자신이 누룩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루카 13,20-21 참조).
그러니 지름길은 절대 안 되고, 누룩이 되어야 하며, 구체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손에 흙과 먼지를 묻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이 보건 의료 위기가 지나고 난 뒤에 있게 될, 가장 최악의 반응은, 다시 열광적인 소비주의[22]와 새로운 형태의 이기적인 자기 방어에 더욱더 빠져드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의 위기를 겪고 난 다음에는, 결코 그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우리는 그 이전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거나, 더 나빠진 모습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선善한 것이 자라나게 합시다. 기회를 포착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공동선(共同善)에 봉사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마침내 더 이상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없게 되기를, 오히려 ‘우리’라고 말할 줄 아는 삶의 방식이 무르익게 하는 법을 우리가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23]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불러일으키시는 능력과 천부적인 재능, 그리고 창의력을 완전히 무효화할 수 있는 시스템들은 없다는 것을,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위기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의 민족과 여러분의 현재,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충실함을 통해, 여러분은 다른 이들과 일치함으로써, 역사를 이루어가는 한 새로운 방식을 엮어 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의 시선으로 도시들의 영혼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분쟁들과 역사의 교차로들 속에서 용기 있게 살아감으로써, 그곳에 복음에서 말하는 참된 행복, 곧 진복팔단의 향유를 발라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세요. 아무도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무도 혼자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115개국 출신인 여러분 젊은이들에게 저는 다음과 같은 점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즉, “꿈이 싹트게 하고, 예언과 비전(vision)을 불러일으키며, 희망의 꽃이 활짝 피어나게 하고, 신뢰를 촉진하며, 상처에 붕대를 감싸주고, 관계를 엮어가며, 희망의 새벽이 부활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우며, 긍정적인 상상력의 결실들을 창출함으로써 지성을 비추어 주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며, 손에는 다시 힘을 주고, 젊은이들에게 – 아무도 제외하지 않고 모든 젊은이들에게 – 복음의 기쁨으로 가득한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24]이 가능한 이러한 경제의 문화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015년 5월 24일), 61항.. [2]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년 11월 24일), 74항. [3] ‘대중운동들의 세계 모임에서의 연설’ 참조, 산타 크루스 델 라 시에라(Santa Cruz de la Sierra), 2015년 7월 9일 [4]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111항 참조. [5] 성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Centesimus annus』 (1991년 5월 1일), 58항. [6]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년 6월 29일), 27항. [7] 교황청 사회과학 아카데미 주최 “새로운 형태의 연대적인 형제애와 포용, 통합과 혁신” 세미나 연설문 (2020년 2월 5일) 참조. 다음과 같은 구절도 상기하도록 하자. “숙고와 대화의 결실이자, 사람들 사이의 관대한 만남의 결실인, 참된 지혜는 단지 데이터들을 축적함으로써만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데이터들은 결국 포화 상태에 이르러 혼돈을 일으키고, 일종의 정신적인 오염을 가져오고 맙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47항) [8]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35항. [9]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 (2020년 10월 3일), 105항. [10]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216항 참조. [11] 이런 공공 정책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필요할 경우, 탈세를 조장하거나,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행태를 부추기기도 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몇몇 기업들이 부정부패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게 하기도 합니다. 이는 정부 정책 영역과의 조율을 거쳐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새로운 형태의 연대적인 형제애와 포용, 통합과 혁신』 세미나 연설문, 2020년 2월 5일, 교황청 사회과학 아카데미 주최) [12] 제1섹터는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가 공공의 목적으로 경영하는 공기업들을, 제2섹터는 민간 기업들이 영리목적으로 행하는 사업들을 각각 뜻하고, 제3섹터는 이 두 부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제3의 부문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해오고 있습니다. 본래 제3섹터(the third sector)는 영어에서 ‘비영리 기업’을 뜻했고, 특히 영국에서 NPO(Non Profit Organization, 비영리 조직, 비영리 민간단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현재 제3섹터는 시민참여로 이루어지는 공익 활동을 통해 정부와 시장의 한계를 보완하는 비영리단체,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공동체, 시민단체, NGO(NPO), 공익법인 등을 모두 포함하는 부문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3섹터를 말할 때, 민간 부문이 가진 자본과 기술 및 정보를 공공부문에 도입하여 공동출자 형식으로 행하는 지역개발사업을 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 옮긴이 주. 참조 웹사이트: https://www.eockorea.com/single-post/2020/02/21/%EC%82%AC%ED%9A%8C%EC%A0%81-%EA%B2%BD%EC%A0%9C%EC%97%90%EC%84%9C-%EC%9D%BC%ED%95%98%EB%8A%94-%EC%9D%98%EB%AF%B8%EC%9D%98-%EC%9E%AC%EB%B0%9C%EA%B2%AC [13]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53항. 가상 현실과 변화의 세계, 그리고 파편화의 세계에서 사회적 권리들이 단지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적인 권고나 호소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적 권리들은 여정의 등대이자 나침반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의 공공 기관들의 건강 상태는 환경에, 또 인간의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며, 이에 따른 결과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142항) [14]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령 「진리의 기쁨(Veritatis Gaudium)」(2017년 12월 8일), 3항 참조. [15]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189항 참조. [16] 성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967년, 3월 26일), 34항 [17]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Spe salvi 」 (2007년 11월 30일), 38항 [18] 성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14항. [19] 유엔 총회 연설 (2015년 9월 25일) [20] 성 바오로 6세, 회칙 『민족들의 발전(Populorum progressio)』, 65항 참조. [21] 회칙 『모든 형제들』, 77항. [22] 제품의 판매와 소비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경제 성향. 대개 매스미디어를 통한 설득과 광고로써 이를 유도한다. 각 개인의 제품 구매와 소비 수준이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문화적 환상과 신념을 심어주는 경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영어 컨슈머리즘(consumerism)을 ‘소비자 중심주의’, ‘소비자 주권 운동’의 의미로 주로 사용해 왔는데, 이 개념과는 별개의 뜻이다. - 옮긴이 주 [23] 회칙 『모든 형제들』, 35항. [24] 『젊은이들을 위한 주교 시노드』 개막 연설 (2018년 10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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