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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선물로 주어진 '두 번째 이름'

프란치스코전교봉사수도회 이강민 베네딕도 수사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의 7장 선물로 주어진 ‘두 번째 이름’을 읽고 느낀 것을 나눕니다.

7장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평화’라는 말을 들으면 무언가 희망찬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쩐지 ‘미래’에 관한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평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가슴속에서 꿈틀대고 있지 않나요? 저는 그렇습니다. 이 책의 저자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도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지구 위, 우리 도시, 우리 동네에서도 ‘들에 나가자며’ 수많은 싸움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수많은 불의한 상황 속에서도 다시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다시 평화를 이룰 때 브루니 교수는 ‘아벨이 다시 살아나’고 ‘아담은 하느님과 함께 다시 거닐며’ ‘서서히 평화가 온 피조물에게까지 퍼져나간다’고 봅니다. 조금 과장된 해석 같나요? 하지만 하느님 말씀인 성경 안에서 한결같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평화’를 뜻하는 단어 ‘샬롬’(shalom)은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데, ‘계약’과 관련하여 살펴볼 때 그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저자는 하느님과 인류와의 첫 계약은 인간이 거부했던 ‘본래의 평화’를 다시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성경에서 계약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최상의 상호 간의 약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고 좋은 것을 내놓을 만큼 인류에게 ‘평화’를 이뤄주려 하셨고 또 지금도 그렇게 하시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에 ‘평화’와 관련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사항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저자도 이 점을 명확하게 말하는데, 평화를 이루는 것이란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에서 단순히 인내하고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브루니 교수는 평화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의 강렬하고도 심오한 목소리가 우리를 평화의 소명에로 부를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그 소리가 누구의 것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고백하지 못할 때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를 이루는 소명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가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느님을 믿거나 알지 못하더라도 양심을 통하여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사람들도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익명의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소명 의식을 느끼고 응답할 때라야 평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 겪게 되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평화는 우리의 노력과 열망과는 다르게,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무력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평화의 건설자’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평화의 건설자 가운데 ‘노아’를 꼽아서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의 땅을 살라기 위해 노아는 ‘자신의 땅’을 떠나라는 소명에 응답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결코 이해할 수 없고 바보같이 보이기까지 하는 ‘방주’를 만들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노아를 통하여 땅 위에 다시 무지개가 찬란히 빛날 수 있었고 세상과 인류를 재창조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한 가지 개인적으로 성찰해 볼 때, 평화를 이루려는 소명을 반대하는 가장 큰 적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됩니다. 나 스스로 하느님의 소명과 약속을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자신의 악습과 부족함에 굴복하여 평화를 이루지 못하도록 만드는 결정적 장본인이 될 때가 많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하느님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약속에 대해 여러분은 정말 설레고 마음으로부터 큰 자부심이 느낍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을 별로 흥미로운 분으로 알지 못하고 또 정말 좋은 분으로 모시고 있지 않다는 간접적 반응일 것입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각각의 이유에 대해 반성하며 성찰하는 것은 유익하리라 봅니다. 저자가 이 약속에 대해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라 오늘날 피부로 직접 체험하는 가운데 생동하는 것입니다. 가령 공동의 집인 지구와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살리고자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평화의 사명을 맡겨주신 분의 목소리를 느끼며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이루며 자신을 그 소명에 불러주신 분의 자녀로서 살아감으로써 자신이 그분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외로움 속에 버려진 고아로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저자는 누군가 이에 대해 의심이 들거나 체험하지 못했다면 평화의 소명을 받고 투신하는 이들에게 물어보라고 권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봅니다. 내면에서 평화를 이루는 소명을 듣고 투신하다가도 이내 온갖 어려움 앞에서 뒤로 둘러서서 ‘새사람’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옛사람’에 머물러 있기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매일의 삶에서 평화를 이루라는 소명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때 새로운 지구, 새로운 땅, 새 사람을 이루는 평화를 이루는 한 땀의 영적 벽돌임을 기억하고 또 믿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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