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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프란치스코전교봉사수도회 이강민 베네딕도 수사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마지막 8장의 주제는 진복팔단 가운데 첫 번째 약속의 수혜자인 ‘가난한 이들’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책의 핵심이라고 여겨집니다.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교수는 이 장을 시작하며 이 행복선언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이천년 동안 해석이 ‘축소’, ‘왜곡’, ‘변질’되었다고 말합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해석을 단순히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 공동선을 위해 부에 대한 애착을 끊고 살아가는 이들 등 영적이고 내적이며 수덕적 범주의 ‘가난한 이들’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향되고 치우친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왜 이렇게 오랫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해석의 경향성을 벗어나지 못했는지 우리 자신도 직면하도록 초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스스로 묻고 대답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과연 ‘정말로’ 우리는 물질적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 주변 및 방송 매체들을 통하여 보고 만나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빈곤과 착취, 부당하게 대우받고 이용당하는 사람들에게, 비참한 삶의 현실을 벗어나려고 만선에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난민들, 변두리 지역에서 집도 없이 노숙인으로 살아가며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나요? 저는 감히 쉽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의 스캔들’, ‘불미스러운 논란’, ‘참된 행복의 역설적인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그들을 빈곤의 현실에서 해방시키고자 자신의 삶을 투신하기도 하고, 외면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의 책임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브루니 교수는 ‘빈곤의 현실’이라는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이 정말로 행복하다는 의미를 지닌다면, ‘우리도’ 이 ‘불미스러운 논란’을 야기하는 땅, 참된 행복의 역설적인 땅을 지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먼저 브루니 교수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태도를 밝힙니다. 그것은 복음과 참행복의 역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함으로써 해결해서는 안 되고, 그 역설의 수준에 걸맞은 범주를 우리 스스로 새롭게 만들어 감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그는 행복선언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있는 그대로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브루니 교수가 강조하는 ‘하느님 나라’의 특징은 ‘아직 오지 않은’ 나라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게 되는 하느님 나라는 역사상 결코 부재한 적이 없는 언제나 현존하는 나라요, 오직 가난한 사람들만이 체험하는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나라이고, 부자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도 원하지도 않고 오직 지상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무상성’이 황금률인 나라,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하는 나라’인데, 부자들은 이 ‘무상성’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브루니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참행복을 역사상 가장 잘 이해하고 육화해서 살았던 인물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꼽습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성인은 ‘물질적 사회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의 기쁨,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전 존재로 체험하며 그 기쁨을 선포했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순히 ‘가난’을 ‘영적인 차원’으로 축소해서 살아가지 않았으며, 가난을 ‘귀부인’이라고 칭하며 ‘가난 부인’과 함께 살아가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수도회가 어떤 것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자신과 수도회 형제들이 ‘작은 형제’라고 불리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 프란치스코가 처음부터 이렇게 ‘가난’을 사랑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부유하게 자랐으며,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 때도 나병 환자들을 보면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쓴 글에서 자신이 느꼈던 그 ‘역겨움’을 ‘하느님’이 ‘감미로움’으로 변화시켜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참행복의 스캔들, 복음의 역설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순종함으로써 ‘실제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던지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생활방식에 매력을 느껴, 자신들도 그 참행복을 살고자 투신했습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그 매력은 계속되고 있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역설은 어느 정도 입증된 듯합니다.

하지만 브루니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의 스캔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직면하고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태생적으로, 삶의 풍파 안에서 혹은 어떤 질병이나 불운을 겪은 후 가난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는 ‘행복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 프란치스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욥’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사상 존재해 온 수많은 욥들을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임을 그도 동의합니다. 브루니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참행복의 행복은 단지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가난한 상태, 하나의 존재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욥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현실 앞에서 그의 친구들의 온갖 위로와 회유의 말은 욥에게 하나도 위로가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비참하고 만들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가난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해 성경은 명확하게 대답해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고통’ 그 자체를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친구들이 오히려 욥의 처지에 그냥 묵묵히 아파하고 함께 해주었다면 욥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욥에 대한 친구들의 몰이해와 온갖 선입견과 판단에 대해 하느님은 분명히 친구들의 잘못을 밝히셨습니다. 우리가 결코 다 이해하지 못하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가난과 그에 따른 고통과 비참함을 우리 각자는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겪고 있지 않습니까? 이 현실 앞에서 단순히 ‘느낌’ 차원의 행복의 범주를 벗어나 하느님 나라, 사랑의 나라의 자녀로서 살아가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하는 ‘삽자가’라고 여겨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십자가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의 열쇠’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끝으로 수많은 프란치스코들과 욥들 간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즉 복음을 위하여 또는 내면에서 그분의 목소리에 따른 소명에 응답하여 스스로 가난하게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이들과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물질적 사회적으로 가난한 이들 간의 관계 말입니다. 부르니 교수는 가난한 프란치스코와 가난한 욥들 사이의 우정보다 더 참되고 더 위대한 우정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요즘 EoC 독서모임에서 읽고 있는 끼아라 루빅의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EoC사업에서 이윤의 일부를 지급받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단순히 ‘도움을 받는 이들’이나 ‘수혜자들’의 차원에서 여겨서는 안 되며 ‘EoC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이고 능동적인 구성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 핵심적인 이유 두 가지를 드는데 하나는 이들이 자신의 가난한 처지를 다른 구성원들에게 ‘선물’로 내어 주는 ‘주는 문화’를 살아가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는 이들이 자립하게 되면 자신과 같은 가난한 처지에 있었던 이들을 돕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끼이라 루빅이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더 근본적인 관점은 ‘사랑의 문화’, ‘일치의 영성’, ‘주는 문화’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복음을 실천하는 것, 버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가난과 질병 등 온갖 고통받는 이들 안에서 그분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분이 베푸셨던 그 사랑으로 가난한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분에게 되갚아드림으로써 사랑과 일치와 기쁨이 더 커지는 문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저 역시도 잠비아의 가난한 이들과 잠시 함께 살아가면서 느꼈던 것은 제가 그들을 내심 도우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그들의 가난함, 순수함, 관대함 그리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나눔이자 우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는 문화’를 시작으로 ‘사랑의 문화’로 성숙되어 가면서 서서히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나 성장하게 되는 ‘겨자 씨’와 같은 하느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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