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소개]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https://eoc-rg.tistory.com/11 [EoC 독서모임] 2016년 11월 8일
최근 한국 사회의 화두 중에 하나는 “대안 경제”이다. 많은 이들이 경제 위기에 대해 말하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저성장과 양극화에 대해 우려하면서 더 이상 기존의 경제 시스템과 관행만으로는 이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시민 경제 등 ‘대안 경제 모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를 한국 사회경제에 적용시키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마침 이 같은 시점에 사회적 경제와 시민 경제학의 대가大家이며 이탈리아 로마 룸사(Lumsa) 국립가톨릭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박사가 2016년 5월 방한한 데 이어, 2016년 11월에 다시 방한한다.
2016년 5월 20일 국회 도서관에서 <모두를 위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브루니 교수의 방한을 계기로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의 하나인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가 도서출판 벽난로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인 《아베니레Avvenire》에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것으로, 세계적인 경제위기 등 한계에 도달한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 상황에서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경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유럽의 경제사를 관통하는 “시장市場과 인간”이라는 주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오늘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핵심 원인 중의 하나는 “시장에서 이윤의 극대화만을 기계적으로 추구하고, 그 시장의 진정한 주인공인 인간 대對 인간의 관계는 경시한 결과”임을 예리하게 분석해 내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종교가 만들어낸 믿음은 더 이상 이 같은 인간관계 면에서의 신뢰와 당사자 개인의 신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경제적 관계에서 개성과 인격을 앗아가는 과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경제 관계의 비인격화 과정은 그 이후 점차 자라나, 결국 우리 시대에 와서 최근의 경제 위기가 글자 그대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경제 위기를 부른 원인의 상당 부분은, 신뢰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금융 시스템, 곧 경제적 재화를 창출해 주는 그 신뢰의 인간관계들과는 무관한 금융 시스템을 구축했던 데에 있다.
그리하여 어떤 기업이 건실하나 어려움에 처해 대출을 신청하는 경우에도,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르는 은행이라면, 너무도 자주 그리고 점점 더, 신용장도, 사람들 간의 만남도 없이, 그저 컴퓨터 시스템의 알고리듬algorithm에서 나온 대출심사 결과 수치數値에 따라서만 응답하곤 하며, 이로써 비인간적인 응답 방식이 되고 만다.
우리 시대의 경제 위기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서로 만나야 하고, 사람들을 신뢰해야 하며 그들의 취약성까지도 신뢰해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와 금융 거래에서 상대편의 얼굴을 대면하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이 같은 거래는 비인간적인 지점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각자가 자기 영역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차원에서 피데스(fides: ‘믿음, 신뢰’를 의미하는 라틴어)를 다시 찾고 활성화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전략이나 그 어떤 정부도 진정 우리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 본문 중에 곧, 저자는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만이 시장경제를 새롭게 건설할 수 있고, 갈등과 대립, 분열로 점철된 오늘의 인류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유럽 경제사와 문화사,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 등을 두루 섭렵하며, <시장경제에서의 인간관계>가 지니는 중요성을 경제사經濟史 및 경제 철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해 준다. 한마디로 오늘의 경제위기의 근원과 그 해법은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간관계의 핵심에는 특히 ‘신뢰’라는 것이 있다. 곧 ‘피데스fides-믿음’은 시장의 탄생에도 필수적인 요소였고, 모든 시장경제의 기본이 되는, “내가 모르는 사람을 왜 믿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함으로써, 대규모 상업 거래의 바탕이 되었음을 분석한다.
“유럽에서 경제 행위가 시작되고 있던 여명기에, 곧 상인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니거나 유럽의 큰 강줄기를 따라 형성되었던 장場터에서 서로 만나곤 했을 당시에는, 아직 사법 체계와 재판 절차, 제재 규정이 아주 취약했고, 종종 전무全無하기도 했다. 따라서 당시의 복합적이고, 위험성이 따르고,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상거래에서는 진정 상대를 믿어야만 했다. 상대편도 양심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제대로 하리라, 또 제대로 납품하리라고 믿고 들어가는 신뢰야말로 ‘믿음’이 주는 중요한 보증이었다. 모르는 사람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깊이 따지고 보면 그 상대편도 사실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상대편도 나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신앙을 갖고 있고 그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기에, 나도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가능했다. 이처럼 피데스(fides: 믿음, 신뢰, 미더움)로 인해 거대한 유럽 대륙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융성했던 그리스의 폴리스polis와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혈족의 울타리를 넘어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필리아philia를 이루었다. 그 폴리스가 이제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훨씬 더 광범위해졌고, 폴리스에서 매우 넓게 확장된 시장은 부富를 배가해 주었고, 상업적, 사회문화적, 종교적 만남도 더욱더 늘어나도록 해 주었다. 믿음은 신뢰를 낳았고, 신뢰는 시장과 부富를 낳았다. 유럽은 바로 이 ‘피데스(fides)-신뢰-끈-믿는 것-신용’이 낳은 결실이다.” - 본문 중에
그러나 자본주의의 탄생과 더불어 이 같은 피데스fides, 신뢰는 깨졌고, 유럽과 서구 경제는 대신 새로운 ‘피데스fides’를 만들어냈는데, 곧 중앙은행과 금융기관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피데스fides, ‘신뢰’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첫 번째 피데스는 ‘인간관계’의 재화, 곧 관계재(關係財, relational goods)였는데 비해, 두 번째 피데스는 이윤추구의 기계적인 극대화 메커니즘에 대한, 때때로 맹목적인 ‘신뢰’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믿음’과 함께 ‘소망(희망)’, ‘사랑(아가페, 이타적 사랑)’이라는 복음삼덕福音三德이 시장경제의 작동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분석해낸다. 또한 고대 서양 문명과 그리스도교에서 보편적으로 추구해온 ‘네 가지 중요한 덕목’, 곧 사추덕(四樞德, Cardinal virtues)’과 경제와의 관련성을 매우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조망한다. 이로써 시장에서도 상호성과 호혜성을 추구하는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한 ‘공동선(共同善)의 경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제시한다.
브루니 교수가 추구하는 이 같은 <대안 경제 모델>은 단순히 이론적인 도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운영 중인 EoC (Economy of Communion) 기업들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자료출처:도서출판 벽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