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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 위기에 처한 경제와 덕德 7

다음은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로마 룸사 대학 경제학과)가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에 경제와 덕德에 대해 주제별로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엮은 책, <익명의 너를 신뢰하라> (이태리어 원본 제목은 Fidarsi di uno sconosciuto)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제7장 절제 _ 궁핍을 넘어서


‘절제’라는 말은 우리 시민사회의 어휘 목록에서 사라지고 있는 단어이다. 경제학 용어 목록에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이로써 그 반대 개념에 자리를 내어준 바 있다. 이태리어에서는 ‘절제temperanza’라는 말이 ‘연필을 뾰족하게 깎다’ 또는 ‘기후’나 ‘음계音階’, 혹은 바흐의 쳄발로(하프시코드) 연주회 등과 관련해서 이미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것들도 중요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절제’라는 의미를 우리 시민사회의 삶의 중심이나, 사회적 약속의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절제’라는 말과 더불어, 윤리 덕목들의 어휘 전체가 사회 공동체의 삶의 기본 원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이 같은 일식 현상에 따른 정치적, 시민사회적, 경제적 결과들은 슬프게도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우리의 문명, 적어도 서구 문명은 더 이상 윤리 덕목들에 들어 있는 ‘좋은 삶’이라는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하겠다. 이는 다양한 원인에 따른 것인데, 특별히 두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원인은 우리 어린이들의 교육부터 시작해서, ‘인성 교육’이라는 분야의 실종에 있다고 하겠다. 자연 발생적이지만 좋지 않은 행동들이나 경향들을 고쳐 주거나 올바로 이끌어 줄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자연스럽고 자연 발생적인 것은 즉시 좋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곤 하는 현상이다. 몇몇 부모들은 불명확한 신新-루소Rousseau적的 교육 이론들이라는 것의 미명美名하에, 자녀들이 자신들을 ‘엄마, 아빠’라는 호칭 없이, 루이사, 마르코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내버려 둔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그들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이죠.” 하면서 “왜 강요해야 돼요?”라고 되묻는다. 반면에 덕德의 윤리학은 본성(우리 모두는 덕德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과 문화(그러나 우리가 이미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연습과 훈련, 그리고 의지가 필요하다) 사이에서 역동적인 긴장감으로 살아간다. 바로 이 때문에, 덕德의 윤리학의 위대한 교육자들은 - 종종 본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지만 - 진정한 스포츠맨들이며, 진정한 과학자들인 것이다.


두 번째 원인은 ‘자신의 한계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도 가치를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 더 이상 없다는 데 있다. ‘한계’라는 것이 지닌 긍정적 요소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덕목들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절제의 덕德은 특히 더 그러한데, 이 덕은 바로 한계가 지닌 가치를 알아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판문서粘土板文書가 태어난 것도 혹시 당시 우루크Uruk 지방의 귀족의 전령傳令이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사람들은 더 이상 절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제의 결핍으로 인한 나쁜 결과들은 우리 가운데에 많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 곧 환경 파괴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부자들과 권력자들의 삶의 방식들, 또 우리가 어떻게 말하는지, 어떻게 이메일을 쓰는지의 문제, 그리고 가족 간의 비극과 끝없는 불행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다양하다. 이 같은 비극과 불행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을 지니고 자신의 격정을 다스리도록, 곧 ‘절제’하도록 교육받아본 적이 더 이상 없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너무도 빈번하다.


과거 세대에는 절제가 큰 경제적 덕목이기도 했다. 절제는 소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인도해 주었고,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던 그 절약을 이루어냈다. 절제의 덕德은 기업가들의 삶도 양성해 가곤 했던 덕으로서, 이들 기업가들은 풍족함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자녀들이 재화를 바르게 쓰고 검소하게 지내도록 교육하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깨어 있고자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이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절제의 덕德은 오늘 나의 소득의 일부를 소비하지 않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내일 나와 나의 가정이 필요에 따라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며, 내가 욕심을 절제abstinence하고 그 자산을 내어줄 때,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이 나 대신 그것을 투자에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고전경제학 이론이 절약을 정당화하기 위해 ‘절제abstinence’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의미 있는 대목이다.


반대로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소비하는 것’ -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하면 더 좋다고 여기는 것 - 에 바탕을 둔 우리의 경제 문화는 자체적으로 양분을 취할 수 있도록 무절제(인색함과 탐식이 함께 엮여 있는 상태)의 악습을 필요로 한다. 만일 우리가 절제의 덕德은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에서 발전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절제의 덕德의 본질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과잉으로 소비하는 양만큼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이 부족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재화를 남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재화의 이용과 가난에 대한 교부敎父들의 모든 가르침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처럼 ‘제한된 자원과 경제적 관계’라는, 이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한다.


1900년대에는, 제2차 산업혁명과 함께, 이제 결핍의 시대가 끝나고 재화를 무한히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에덴동산에 우리가 마침내 도달했다고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마치 이 세상이 잠재적으로는 자원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장소인 것처럼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절제를 덕德으로서 받아들이던 관행이 쇠퇴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아쉽게도 이 ‘무제한 자원’의 시대는 그저 번갯불처럼 왔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환경이, 그다음으로는 에너지와 물이, 따라서 시민사회적 자본들이 악화되고, 또 인간관계의 자본들, 그리고 영성적 자본들이 악화됨에 따라, 점차로 또 다른 한계들을 보여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또 다른 한계들은 사적재私的財, private goods가 부족했던 시대 - 그러면서도 공동자본collective capital은 풍부했던 시대 - 의 한계들에 비해 덜 긴박하거나 덜 심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오늘날 새로운 한계들은 특히 그 본질상 사회적이고 세계적인global 한계들이며, 이에 대해 절제의 덕德을 즉시 재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한계’가 지닌 가치를 내면화內面化하는 것은 이미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단지 덕德의 새로운 윤리학만이 그것을 할 수 있는데, 모든 내면화는 오늘날 우리 문화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실용주의적인 ‘비용 대비 수익 계산’ 방식을 넘어서서, 사물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볼 줄 아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나의 절제와 개인적인 안녕, 우리의 공유재 사이에 명확한 관계가 존재했던 반면, ‘복합성Complexity’의 시대인 오늘날에는 이 같은 관련성이 불명확해졌다. 내가 우리 집에서 에어컨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도시의 온도를 상승시킨다는 것과 관련짓는다거나, 이에 따라 다시 에어컨 사용이 더 늘어난다고 하는 악순환의 어두운 미래상을 떠올리는 것이 이제는 더 이상 즉각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사회를 ‘탈脫-중상주의화重商主義化’ 하지 않는다면, 즉 우리가 오늘날 가격의 논리와 각종 인센티브에 의해 점령당하고 식민화된 시민사회의 삶의 중요한 분야들을 해방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검소儉素함과 절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의 가치를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아이들도 점점 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과거에나 지금이나, 절제 없이는 재화의 나눔도 없고, 공유를 통한 친교와 일치의 기쁨도 없을 것이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8 [EoC 독서모임] 2016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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