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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경제 EoC-루이지노 브루니 교수 강연

루이지노 브루니 & 정운찬에게 듣는다. 모두를 위한 경제, An Eoconomy for all

함께 성장하고, 함께 행복한 경제 - 루이지노 브루니 강연 -

지금 현 시대는 영국, 폴란드, 헝가리에서도 정치적으로 어려움, 미국에서도 트럼프 당선과 같은 여러 현실이 있다. 이렇게 시대마다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이런 사건들은 상징적인 메시지가 있다. 10여 년 전 세계화가 시작었고, 나라들의 국경선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작업은 중지되었고 국가들 사이의 국경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다른 나라로부터 자신을, 자기 나라를 방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여러 어려운 현 시점에서 나는 communion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이나 모두를 위한 경제, EoC의 메시지가 더욱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이 강연의 주제는 Laudato Sii, for sister plant, For a new spirit of capitalism 이다.


Laudato Si '찬미받으소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자연에 대한 찬가의 첫 구절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식물을 누이sister라고 이야기한다. 식물과 경제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EoC에 대해 식물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최근에 나는 식물성 기업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5억 년 전부터 식물과 동물은 다른 진화 경로를 보였다. 동물은 뛰기 시작했고 식물은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우리 인간도 동물처럼 뛰기 때문에 고착화된 식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아프면 식물을 이해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느려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숲 속에 들어가면 아무 변화가 없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는 식물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나름대로의 여러 방법으로 발전을 해야 했다. 도망갈 수도 없고 심지어 동물들에게 그냥 먹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감각은 더욱 예민하고 섬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5가지 감각이 있는 반면, 식물은 20가지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변 환경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그렇다고 한다.


영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식물이 기생충의 공격을 받으면 식물 주위 나무들이 같이 힘을 모아 방어한다. 동물은 개인적인 반면, 식물은 집단적인 유기체이기에 이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식물 역시 동물처럼 호흡하며 말하고 듣는다고 한다. 이는 최근에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듣고 느끼고 대화한다고 한다.

하지만 식물은 동물처럼 장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동물은 폐로 숨을 쉬고 귀로 듣는다. 반면에 식물은 온몸으로 호흡을 한다. 듣는 것도 온몸으로 듣고 소통도 온몸으로 한다.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기능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식물은 온몸을 활용한다.


그런데 이것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가?


식물에게는 고착성이 큰 취약점이다. 예를 들어, 사슴이 풀을 먹으려고 하는 경우, 풀은 그저 먹혀야 한다. 먹힐 수밖에 없다.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기능을 온몸으로 분산한 것이다. 식물은 10%만 남아도 살아남는다. 동물을 멸종시키는 것이 식물을 멸종시키는 것보다 더 쉽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은 매우 경이로운데, 엄청난 취약점이 역으로 엄청난 힘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 식물의 특성과 경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실 우리의 경제는 식물적인 특성을 닮지 않았다. 경제사상을 보면 인간이 동물이기에 기업과 사회구조를 동물적으로 파악하였다. 기업을 만들 때도, 경제에 대한 생각을 했을 때에도 동물적인 생각을 하였다. 기업은 사장이 있고 핵심부서가 있고 여러 역할과 기능이 있다. 이렇게 기업은 수직적인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로 기업의 활성화, 효율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머리를 치면 죽는다는 취약점이 있다. 사장이 기업에서 빠지면 기업은 망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실제 여러 기업들이 망하기도 하였다. 창업자가 죽으면 기업은 잘 돌아가지 않고 문을 닫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다른 모습의 기업도 있는데 구조에 있어 식물적인 기업 형태가 그것이다. 협동조합이나 EoC 기업은 마치 식물처럼 해당 지역에 남아 있는 경향이 있다. 마치 성심당이 다른 도시에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해서 대전을 떠나 그 도시로 옮겨가지 않고, 계속 대전에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역에 있는 작은 기업이 대기업보다 더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역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식물처럼 온 몸을 통해 호흡하고 느끼고 버텨야 한다. (식물 기업의 형태인) EoC 기업이 언제 튼튼해질까? 바로 모든 직원이 그 문화를 느낄 때이다. 모든 직원들이 EoC 문화를 알고 있다면, 설령 기업에 문제가 생겨도, 직원 한 사람만 남아도 그 기업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원동력이 있기 때문에, 그 기업은 마침내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구글이나 페이스북처럼 Web에 기반을 둔 기업은 식물성 기업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원래 웹은 ‘거미줄’이라는 뜻이다. 딸기 줄기처럼 땅에 붙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운 경제 형태인 web 기업의 문제는 아직까지도 모든 권력을 사장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애플의 경우에는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이 기업이 식물성 기업이라면 살 수 있을 것이고 동물성이면 망할 가능성이 높다. 동물성 기업이라면 창업자가 죽었기 때문에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협동조합처럼 미래의 기업이 더 식물적인 기업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쯤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를 들어, 한국에 커다란 대기업이 외국 자본을 들여와 운영을 한다면, 대기업을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그 기업의 방향이 좌지우지될 수가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대기업은 정치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정치는 처음과 마지막 단계에 관여할 수 있지만 과정에 관여할 수는 없다. 이 현실에서 대기업에 평범한 시민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시민들은 정치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의 운영과 같은 경제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금융 시장에 큰 문제가 생길 때 누가 이에 답할 수 있는가?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간섭을 하게 되는데, 정부 역시 많은 실수를 한다. 심지어 정부의 개입 이후에도 금융 시장은 더 어려워지기도 한다. 잘 운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처음과 끝뿐만이 아니라 과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시민이 관심을 가지고 계속 지켜봐야 한다.

마치 공산주의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금융기관에 소수의 자본가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운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내가 제안을 하였는데, 금융기관 중 천 명이 넘는 기관에는 윤리위원회가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위해 뽑힌 시민들이 모든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안한 것이다.

결국, 시민 전체가 경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선거를 할 때만 군주처럼 중요한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고, 선거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에는 추종자 신세에 불과한 셈이 되고 만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겠다.


유럽의 한 철학자의 이야기이다.


자본주의는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예전에 종교에서 자본주의는 마치 두려울 때 종교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처럼 종교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벤자민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는 그리스도교의 기생충으로 발전했다.” 이는 서양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다른 연구자인 어느 일본 학자의 말이다.


유교 문화권에서도 비슷한 상황인데 중국. 일본.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종교처럼 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노동 윤리와 소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종교를 넘어서 거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 시대에는 경제가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우리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시민의 삶 전체의 문화가 되어 버렸다.

이건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20세기에는 정치와 민주주의가 주요 패러다임이었다. 그래서 20세기에는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정치를 하라.”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21세기에는 경제가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이제는 “무언가 제대로 하려면 대기업을 모방하라.”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효율. 속도. 실적 등등을 강조하는 시대인 것이다. 이것이 우세한 패러다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정치가 잘 돌아가게 하려면 대기업의 컨설턴트를 모셔 와서 조언을 들으면 잘 될 것이라는 이야기마저 한다.


경제의 덕, 곧 경쟁. 효율성 등이 삶의 모든 분야의 덕으로 확장되고 있다. 즉, 경제의 범위를 넘어 병원, 교육 등에도 이런 경제의 덕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덕에 위협적인 현상이며 전 세계적으로도 위험한 현상이다. 경제로만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기 에는 충분하지 않다. 경제의 덕이 우리에게 삶의 덕, 인생의 덕이 된다면 분명히 (우리의 삶은) 실패할 것이다.


대기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삼성, 현대 등의 대기업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가?

내 생각에는 직원들의 덕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대기업들이 발전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 덕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가정에서 만든 덕이다. 그러나 삼성이라든지 여러 대기업은 더 이상 이 덕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덕은 이윤에만 목표를 두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살펴보면, 나는 ‘루이지노’이기도 하고 ‘브루니 교수’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여러 형태로 표현된다. 내가 있는 대학을 하나의 기업이라고 할 때, 대학은 브루니 교수를 살 수는 있다. 인센티브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루이지노를 살 수는 없다. 내 열정은 살 수 없다. 내 마음, 루이지노의 덕을 살 수는 없다. 다만 이 덕은 선물로 줄 수 있다. 기업들은 계약을 할 때 덜 중요한 것을 사는데, 더 나아가 대학에서 루이지노를 살 수 없다면 (더 큰 덕을 얻지 못하면) 결국 (그 계약은) 실패한 것이 될 것이다.


기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덕이 필요하다. 이는 경제의 역설이기도 한데 기업은 그 덕을 필요로 한다. 덕을 제공해야 기업이 살아남는다. 그래서 기업에 선물을 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필요하다. 따라서 기업은 사람의 덕을 인정해야 한다. 보통 기업은 그 덕이라는 선물을 훔쳐서 쓴다.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을 강제로 가지고 간다.


우리 사회가 점점 이런 덕을 가진 사람을 양성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이다. 이로 인해 기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기업은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덕이 끝날 때, 덕이 다 없어질 때 덕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나 소모를 했는지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오늘날 경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덕들이 필요하다. 살 수 없는 덕인 겸손, 친절, 환대 등등 이것은 기업이 가지고 있는 덕이 아니다. 하지만 기업이 이러한 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기업은 망한다.


EoC의 정체성, 메시지는 이러하다.


노동자를 노동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삶의 여러 차원을 열어야 한다. 노동자가 노동만 하면 좋은 노동자가 아니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난다. 시민들의 덕을 다 소비해 버리고 나면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덕의 재생이 어렵다. 생각하는 관점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덕을 재생하기 어렵다.


오늘날 경제의 도전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루이지노와 브루니 교수가 둘 다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니 교수가 루이지노를 먹어 버리지 않아야 한다. 경제와 communion이 함께 생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출처: https://eoc-rg.tistory.com/14 [EoC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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