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삶은 전쟁에서 이길 줄 안다.
과오보다 더 큰 것 / 10
- 역사책에 함께 기록되는 비천한 도구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사야서 2장 4절)
역사책은 강하고 오만한 승자, 그리고 굴복하는 약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런데 그런 역사책에서도, 몇 군데에서는 다른 지면들과 만나게 된다. 곧, 자연적인 질서가 뒤집히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 높여지며, 교만한 자들은 패하는 대목들이다. 이런 지면들의 수는 적지만, 그 눈부신 빛이 책 전체를 비추고, 변화시켜 주며, 의미를 바꾸어 주고,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이는 인류를 움직이는 또 다른 원리, 곧 제2법칙을 드러내 주는 이야기들이다.
이는 안나와 마리아의 마니피캇의 법칙이자, ‘임마누엘’[1]에 대한 예언,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고난을 겪고 영광을 받는 종,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분, 로사 파크스(Rosa Parks)[2]의 법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대 기업의) 제국들과 파라오들로부터 희생자들을 해방시킨, 또 지금도 해방시키고 있는 그 협동조합 조직들과 노동조합들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적인 위계질서만이 유일한 가능성은 아니라는 점, 또한 언제나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상황과 모든 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왜 우리가 크고 강력한 소음 속에서도 때때로 작고도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 소리를 따르게 되는지, 바로 이 취약하면서도 굳건한 법칙 자체가 설명해 준다. 또한 왜 그때 우리가 이제는 그만 포기해야 할 것 같은, 가장 설득력 있는 백 가지의 이유들보다도, 오히려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할, 단 하나의 작은 이유를 더 믿을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준다. 또는 왜 우리가 그 결정적인 두 갈래 길 앞에서, 성공과 권력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쪽 길로 들어섰는지도 설명해 준다. 그 다른 쪽 길이 장차 우리를 더 보잘것없고 취약하게 만들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또 다른 페이지, 또 다른 역사, 또 다른 법칙이다. 우리가 다른 길로 들어서는 이유는, - 그 길이 더 작은 길이기에 - 어쩌면 그곳에 더 진실한 구원의 유일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아마도 단지 우리 마음이 이끄는 대로 유순히 그 길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의 영(靈)이 사울을 떠나고, 주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그를 괴롭혔다.” (사무엘기 상권 16장 14절)
사무엘이 다윗을 선택해 기름을 붓는 그 빛나는 장면 이후에, 이야기의 배경은 사울의 궁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서, 야훼 하느님의 눈 밖에 나서 그분께로부터 내쳐진 왕이다. 성경의 이 본문에서 우리는 사울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나쁜 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임을 보게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늘 불변하는, 또 다른 상수(常數)와도 같은 요소인데, 여기에서 다시 등장한다. 선한 영(靈)이 사울을 떠났고, 그 자리에 악령이 들어와 그를 괴롭히는, ‘영(靈)의 교체’가 사울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구원사의 주역들에게 내리는 축복과 저주는 결코 단지 자연적인 것(질병, 우울증...)만은 아니며, 항상 더 높은 뜻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경에서 야훼(YHWH)는 선(善)한 영과 악(惡)한 영의 근원이다. 거기서는 선(善)한 신과 악(惡)한 신, 빛과 어둠 사이의 어떤 투쟁도 볼 수 없다. 반면에 이런 투쟁은 중동의 이원론적 변신론(辯神論)[3]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야훼가 유일하고 참된 하느님이라면, 지상에 있는 악령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악령들도 바로 하느님 당신께 속한 것이라고 (하느님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 일부라고) 보는 것은, 야훼(YHWH) 하느님이 이 세상의 악(惡)과 고통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 – 그것이 하느님이 직접 저지른 잘못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책임은 있다고 하는 것 – 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상처 입은 피조물들이 던지는, 그 어렵고도 불편한 질문들, 또는 예언자들을 통해 제기하는 그 어렵고도 불편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책임감은 일반적으로 성경을 (또한 우리를) 짓누르는 듯한 두려움을 준다. 그러나 때로는 이 두려움에 도전하고 이를 극복하는, 성경의 가장 용감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신적, 인간학적인 걸작들을 선사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이 세상에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만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하느님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런 이야기들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높아서, 단지 삶의 선하고 아름다운 측면에만 하느님을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성경의 하느님은 진부(陳腐)한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 자녀들을 괴롭히는 “악령들" 이 어디서 왔는지도 말해 주어야 하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이는 욥기에 나오는 욥의 위대한 노래에서 전하는 메시지기도 한데, 거기에서 사탄은 엘로힘[4]-하느님의 궁에 있는 천사들 중의 하나로 나온다. (욥 이후에, 그리고 욥 덕분에 성경의 하느님은 세상의 악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지니게 됐다.)
사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느님께서 내리신 악령이 임금님을 괴롭히고 있으니, (…) 비파를 솜씨 있게 타는 사람을 하나 구해 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악령이 임금님께 내릴 때마다 그에게 비파를 타게 하면, 임금님께서는 편안해지실 것입니다.” (사무엘기 상권 16장 15절-16절).
젊은 시종 가운데 하나가 말하였다. “제가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그런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비파를 잘 탑니다.” (16장 18절 참조) 사울은 전령들을 이사이에게 보내어, “양을 치는 너의 아들 다윗을 나에게 보내라.” 하는 말을 전하였다. (16장 19절)
젊은이가 왕궁에 도착하였고, 이 대목에서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이사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일렀다. “다윗이 내 눈에 드니, 내 앞에서 시중들게 하여라.” (16장 22절)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 (16장 23절)
전승(傳承)에 따르면, 경이로운 시편을 지어 몸소 노래한 위대한 음유 시인이었다고 하는 다윗이, 고통받는 사울을 위해 비파를 연주하고 이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모습은 매우 아름답다. 성경에서의 그의 첫 번째 연주는, 하느님의 영(靈)에 의해 내쳐지고 버림받은 왕을 위한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노래는 어떤 대가(代價)를 바라지 않고 무상(無償)으로 부른 노래이다. 이 이야기는 성경이 쓰여진 당시 고대 세계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음악은 축제의 흥을 돋우고, 찬미의 예식과 춤에 맞추어 함께 나오곤 하는 것이었으며, 악령을 몰아내는 것이기도 했다. 성경에서 예술가들은 비범하고 초자연적인 힘으로 하느님의 영(靈)에게까지도 '명령'할 수 있었다. 음악은 (또 모든 예술은) 세상의 영(靈)들과의 이런 대화이기도 하다. 또한 다이몬(daimon)[5]의 신비한 산파(産婆)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전히 다윗의 비파의 매력에 매료되어 있는 동안, 이야기는 고대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면 중의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들에 맞서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추고 있는 전장(戰場)에 와 있다. 필리스티아인들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전사(戰士)가 나선다. 키가 엄청 크고 단단히 무장을 한 그는, 적군들을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전사이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 맞붙어 싸울 자를 하나 내보내라.” (사무엘기 상권 17장 10절)
이 전쟁 장면의 한가운데에 다윗이 등장한다. 다윗은 마치 이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는 사람처럼 거기에 나타난다. 성경을 최종 편집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여러 전승의 본문들이 서로 겹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다윗의 아버지 이사이는 사울의 군대에서 군 복무 중인 다윗의 세 형들(자신의 아들 세 명)을 만나보고 오라고 다윗을 보냈다.
이사이가 아들 다윗에게 일렀다. “네 형들에게 이 볶은 밀 한 에파와 빵 열 덩이를 가져다주어라. 진영으로 뛰어가서 네 형들에게 주어라. (…) 형들이 잘 있는지 살펴보고 그들에게서 잘 있다는 표를 받아 오너라.” (17, 17-18)
막내인 다윗은 그의 형들에게 끼니를 가져다 주도록 보내진다. 또한 다윗은 형들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받은 돈을 집에 가져오도록, 또 형들이 '건강’히 잘 있는지, 또 영신적으로도 잘 있는지(샬롬shalom[6], 곧 평화를 지닌 상태인지) 알아 오도록 보내진 것이다.
성경에는 (형들이 잘 있는지) 형들의 샬롬에 대해 확인해 보고 오도록 보내졌던 또 다른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창세기 37장 14절 참조). 여러 형제 중에 끝에서 두 번째였던, 이 또 다른 작은 소년은 요셉이었는데, 그는 버려지고 팔려갔었지만, 나중에는 형들과 백성들의 구원이 된다.
다윗도 자기 형들에게서 꾸지람을 듣고 비난을 받았다.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기 상권 17장 28절)
다윗은 골리앗을 보고 그의 말과 위협을 듣는다.
사울이 다윗을 불러들였다. 다윗은 사울에게 “임금님의 종인 제가 나가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과 싸우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기 상권 17장 32절)
사울은 다윗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기에 망설인다. 다윗은 자신이 양치기로서 해냈던 일들을 예로 들면서 사울을 설득하고자 한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무리에서 새끼 양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저는 그것을 뒤쫓아 가서 쳐 죽이고, 그 아가리에서 새끼 양을 빼내곤 하였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덤벼들면 턱수염을 휘어잡고 내리쳐 죽였습니다. (17, 34-35)
사울은 다윗을 믿고 그에게 복을 빌어 준다. “그러면 가거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 (17, 37)
이는 사울을 ‘좋게 보는’ 또 다른 대목이다. 하느님의 영이 멀어진 자도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이 있음을 깨닫고 그를 축복해줄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이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알 때도,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 하느님의 이름으로, 혹은 자기 자신은 잃어버린 이상(理想)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설적인 결투는 어떤 군사 행동에 대해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신학적인 결투이고, 다윗에 대한 부르심을 묘사하는 또 다른 이야기이며, 하느님의 또 다른 발현이다. 골리앗은 참 하느님의 계약의 궤를 만나 다시 ‘땅에 얼굴을 박은 채’ 넘어지는 우상의 이미지, 곧 새로운 다곤(Dagon)[7]이기도 하다(사무엘기 상권 5장 3절).
사울은 다윗이 전투에 좀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다윗에게 자신의 무거운 갑옷을 주고 단단히 무장시키지만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런 무장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이대로는 나설 수가 없습니다.” (17,39)
그는 갑옷 없이 맨몸으로 단지 양치기의 막대기와 무릿매 끈을 들고, 개울가에서 매끄러운 돌멩이 다섯 개를 골라서 가방 주머니에 넣은 다음, 골리앗에게 다가간다. 골리앗이 다윗에게 소리친다. “막대기를 들고 나에게 오다니, 내가 개란 말이냐?” (17, 43)
그리고 “자기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였다.”
그러나 골리앗이 다윗을 향하여 다가오자마자, “다윗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 하나를 꺼낸 다음, 무릿매질을 하여 필리스티아 사람의 이마를 맞혔다. 돌이 이마에 박히자 그는 땅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17, 48-49)
막대기와 무릿매 끈이 창과 봉(棒)을 이길 수 있다. 어마어마하게 튼튼한 갑옷을 입은 상대를 맨몸으로 격퇴한 것이다. 다윗의 승리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첼리니가 천재적인 직관으로 느꼈던 것처럼, 전사(戰士)의 승리가 아닌, 맨몸의 양치기가 거둔 승리였기에, 최고의 승리였다.
다윗은 전사로서가 아니라, 양치기로서 골리앗과 싸웠다. 그는 양치기의 평범한 작업 도구로 강력한 골리앗을 물리쳤다. 무기를 쓰는 일이 양치기의 일을 이기지 못했다. 다윗은 전쟁 기술이 아닌, 자기 직업을 통해 숙달된 기술로 골리앗에게 도전해도 좋다는 허락을 사울에게서 받았다.
오늘날에도 강력하고 위압적인 이들이 계속해서 전쟁 기술을 연마하며, 그들의 무기들과 함성들로 세계를 위협하며 두려움을 주곤 한다. 반면에 예술을 통해, 또한 노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과 기술을 꾸준히 연마해 가는 사람들도 있다. 때로는 이 사람들이 그들의 노동으로써, 하찮아 보이는 노동의 도구로써 전쟁에서 승리하고 죽음을 이길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역사책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한 페이지를 추가하게 되는 것이다.
선한 양치기 다윗은 그의 막대기와 지팡이만 가지고 맨몸으로 승리하는 모습으로 또다시 태어나고 또다시 살아간다.
[1]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으로,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다음 성경 구절의 예언과 관련돼 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마태오 복음 1장 22절-23절) * 옮긴이 주
[2] (1913–2005)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그녀가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버스로 이동 중에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기사의 명령을 거부했다가 경찰에 체포된 것을 계기로,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 흑인 인권 현실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 옮긴이 주
[3] 신을 변호하는 이론. 악(惡)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악의 존재가 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고 논증. * 옮긴이 주
[4]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 27:46)의 ‘엘리’는 엘로힘의 변형이다. – 가톨릭대사전 참조. * 옮긴이 주
[5] 고대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여기서는 한 사람의 ‘잠재력’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 옮긴이 주
[6] ‘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 * 옮긴이 주
[7] 필리스티아인들이 섬기는 대표적인 신. 히브리어로 ‘곡식의 신’을 뜻한다. 다곤 신을 믿는 필리스티아인들이 하느님의 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둔 적이 있었는데, 하느님의 궤 앞에서 다곤 상이 쓰러진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다곤이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다곤을 일으켜 제자리에 다시 세웠다. 그들이 다음 날도 아침 일찍 일어나 보니, 다곤이 또 땅에 얼굴을 박은 채 주님의 궤 앞에 쓰러져 있었다. 다곤은 몸통만 남아 있을 뿐, 머리와 두 손이 잘려서 문지방 위에 널려 있었다.” (사무엘기 상권 5장 3절-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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