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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사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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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 – 노동의 가치와 인간관계들, 그리고 벌거벗은 임금님.

자본주의의 사순절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글

2020년 3월 11일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지誌》에 게재

2020년 3월 11일 『모두를 위한 경제, EoC』 국제 웹사이트에 게시


새로 등장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가 경제의 양면적인(ambivalent) 특성, 곧 양가성(兩價性)도 드러내주고 있다. 노동하기에 어려운 여건에 직면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 시간을 사랑하는 것에 앞서, 먼저 우리의 노동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일요일이면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음 날이 월요일이고, 다시 직장에 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평일이 없으면 휴일도 그 의미가 퇴색한다는 것을 말이다. 바로 이 때문에도 우리 모두는 누군가 우리에게 일하는 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이에 거세게 저항한다. 확실한 안정감을 지키고자 하는 분명한 이유 때문이기도 한다. 우리가 공장과 사무실의 문을 열어 놓고 싶어 하고, 그렇게 열어 놓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이유는, 단지 GDP(국내 총생산)가 너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우리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급여를 벌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일할 수 있고, 함께 일할 수 있는 한, 그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서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노동의 한 차원이자 소명으로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바와 같이 심각하고 크나큰 위기만큼, 이를 우리에게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도 없다. 결국 우리가 우리 내면을 잘 살펴본다면, 일종의 죽음의 한 형태 같은 것이 우리를 위협할 때는, 노동이 이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왜냐하면 단지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 간의 투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노동>과 <죽음의 비非노동> 간의 투쟁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 타나토스(thanatos)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신.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Freud)는 퍼스낼리티 이론에서 ‘죽음의 본능’을 가리키기 위해 타나토스(thanato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는 공격성과 같은 파괴적인 모든 본능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삶의 본능’인 에로스(eros)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실제로 우리가 직장에 일하러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죽음을 물리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가 평소에는 결코 이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공동의 생성 작용(collective generative action)을 통해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해냄으로써, 매일 “생명이 더 위대한 것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에 나오는 삶과 죽음에 결정적인 많은 일화(逸話)들은, 해당 인물들이 노동을 하고 있는 가운데에 일어난다고 하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겠다. 양 떼를 치고 있던 모세로부터 시작해서, 노동을 하는 도중에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에 이르기까지 그 사례들은 다양하다.

몇몇 언어에서는 ‘노동’이, 아이를 낳는 고통, 곧 ‘산고(産苦)’에 매우 가까운 의미라고 표현되는 것이 우연이 아닌 점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고통인 그 해산(解産)의 진통(陣痛)은 이 측면에서도 노동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하겠는데, 단지 취미나 게임이 아닌, 모든 진정한 노동에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평상시에는 경제학자들이나 정치인들로부터 매우 비웃음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인간관계’의 재화, 곧 관계재(關係財, relational goods)라는 것이, 일반 재화 못지않게, 또 그 이상으로 필수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 특히 노인들이 - 빵을 사러 가는 것은 그 동네의 다른 사람들과 서로 말을 섞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 자체를 ‘소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는 점을, 아마도 무엇보다 그것을 위해 빵을 사러 간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새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시장(市場)에 가는 것은 ‘서로 말을 섞기’ 위해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무엇보다도 그것을 하려고 가는 것이다.

“필요한 것들의 순위를 매겨, 그 순위대로 중요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피라미드 모형”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큰 위기들이 닥치면, 낡은 피라미드들은 뒤집히곤 한다. 모든 문명들은 늘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었다. 이에 반해, (경제 제일주의로서의) 자본주의는 이것을 망각해왔다. 최근의 고통을 통해 자본주의가 이것을 다시 배울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해보도록 하자.

하나의 ‘공동악(共同惡)’, 곧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공동선(共同善)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듯이, 강제된 고독은 우리에게 인간관계의 가치와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다. 시장(市場)에서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두어야 하는 현실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울 때 어떤 점이 아름다운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고, 이를 그리워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경제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있고, 점점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고 있는, 주식시장의 얼굴이자, 투기의 얼굴이며, GDP(국내 총생산)가 줄어들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상법 전문가들의 각종 상법 연구, 몇몇 공장들, 재무 분석가(financial analyst)들의 각종 연구, 여러 유형의 상점들 등과 같이, 사람들의 삶에 필수적인 것은 아닌, 몇몇 상업활동들과 생산활동들을 (이번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일단 멈추게 하려는 노력 역시도,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지금까지 가로막혀왔던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매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활동들에 몰리곤 하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풍조들 때문에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우리 모두 멈춥시다(fermiamoci tutti).”라는 운동을 벌였을 때, 학교는 즉시 멈출 수 있었지만, 비즈니스(business)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계속 다음과 같은 생각을 거듭하고 있다. 곧 GDP(국내 총생산)나 가산금리(spread), 공적 채무, 안정 협약* 등에 대해서는 잠시 잊어버리고, 만일 일종의 <자본주의의 사순절*>이 있을 수 있다면, 이 바이러스가 너무도 위협적으로, 빨리 확산되는 것을 늦추기 위해 효과적인 치유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 『안정과 성장에 관한 협약(The Stability and Growth Pact, SGP)』

유럽연합(EU)이 경제 및 화폐공동체를 지향하기 위해 도입한 ‘유로화’가 안정되도록, EU 회원국 간의 재정정책을 조정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1997년 채택된 협약이다. 회원국은 한 해의 예산적자가 GDP의 3%를 초과하지 않아야 하고, 국가채무는 GDP의 60% 이하여야 하는 등의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


* 사순절(四旬節, Lent)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인류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고 준비하기 위해 설정한 40일간의 기간이다. 40이라는 숫자는 그리스도가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며 기도했던 사실에서 유래된 숫자다. 구약성서에서도 40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노아의 홍수 기간, 모세가 십계를 받기 전 단식한 기간, 호렙산에서 엘리아가 기도하던 기간인 40일과,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방랑한 40년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엄격히 단식하던 것을 본받아, 자신의 희생과 극기(克己)를 통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또한 40일 동안 단식과 금육(禁肉)을 통해 절약한 것을 모아 두었다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출처: 가톨릭 대사전 등]


이와 같은 경제 논리들은, 앞서 언급한 ‘노동과 삶의 논리들’과는 다른, 여러 논리들이자, 그것들과는 대립되는 논리들이다. 공동선(共同善)이 아니라, 결국 비즈니스(business)가 최종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회적 시스템을 우리가 구축해놓았다고 사람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정치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실행할 힘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이탈리아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자, 유럽에서,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 더더욱 그렇게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보건의료 면에서의 위기가 경제, 특히 금융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 사실 금융이 항상 경제의 우군(友軍)인 것만도 아닌데, – 혹은 아무쪼록 피하기 위해, 이 위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평가절하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잘 살펴보면, 지난 수십여 년간 우리가 구축해놓은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중요한 메시지들을, 이와 같은 위기에서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불패(不敗)의 원칙이라고 여겼던, 시장(市場)의 신호들을 좇으면서, 너무도 많이 달려왔다. 반면에 우리는 인간의 공동생활의 근본 원칙,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서는 ‘사전 예방의 원칙’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원칙을 적용하지는 않았다.

‘사전 예방의 원칙’을 지키는 공동체는 흑조(黑鳥, 흑고니, Black Swan)가 올 때까지 마냥 손놓고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다시 말해, 보통은 잘 일어나지 않지만, 한번 발생하면 엄청난 피해를 주는 재난의 경우에 대비하고자, 위기에 대응할 장비를 미리 갖추고 있다. 자본이 이끄는 대로만 끌려다니지 않는, 현명한 공동체는 평상시에 미리 방어 태세를 갖추어 놓기 위해 투자를 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기업 차원에서 각종 보험을 들면서 매일 이런 투자를 하고 있는 데 비해, 사회 전체를 위해서는 더 이상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수년 전부터 심각한 경보음(警報音)들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 전체는 결정적인 문제들 앞에서 전적으로 위험에 노출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서 한 어린 아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라고 말했듯이, 1년 전에, 어떤 한 소녀는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임금은 벌거벗은 임금이라고 말해 준 바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번영의 신화와 물질 만능의 환각에 넋을 잃은 채, 마치 그 임금의 옷이 실제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살아온 것이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는 이에 이어지는 두 번째 메시지이다. 즉, 우리가 사태를 관리하고 난 다음에, 예전처럼 계속 살아가거나, 아니면 우리가 이번 일을 현명하게 해석하고, 이제는 예전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매우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메시지이다.


이태리어 원본 기사 전문 《아베니레(Avvenire)지誌》 웹사이트:


혹은 『모두를 위한 경제, EoC』 국제 웹사이트 (기사 도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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