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간구하나이다, 부활하소서!
영혼과 수금(竪琴)/3 – ‘아버지’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부성애, 십자가에 못 박힌 자녀에게서 십자가의 못을 뽑아내 주는 놀라운 기술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글
2020년 4월 12일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지誌》에 게재
2020년 4월 11일 『모두를 위한 경제, EoC』 국제 웹사이트에 게시
“나는 더러워요, 밀레나, 무한히 더럽답니다. 그래서 나는 순결에 대해 요란하게 떠들곤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가장 깊은 지옥에 있으면서도, 너무도 순결하게 노래하지요. 이들만큼 그렇게 순결하게 노래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어떤 노래를 들을 때, 마치 천사들이 합창하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되는 노래는 바로 그들의 노래랍니다.”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시편 제3장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훌륭한 해설 중에 하나이다. 이곳에는 성경에서 가장 인간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기도 중에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이지만, 이에 앞서 근본적인 인간학적 경험이기도 하다. 부활한다는 것은 인간이 지닌 능력들의 레퍼토리(repertory) 중에 하나로서, 사람들은 부활할 줄 알기에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이는 필수적인 몸짓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부활의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의 마지막 시선 안에서 직관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그 징표를 통해서도, 이 사실을 보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그 마지막 인사가 마지막이 아님을 느낀다.
그리고 죽음이 끝에서 두 번째인 자신의 자리에 있는 법을 배우게 되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 곧 그 뒤에는 부활이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되면) – 그런데 이것을 배우는 데에는 존재하는 온 시간, 즉 평생이 걸린다. – 비로소 (프란치스코 성인이 노래한 대로) “자매인 죽음”이 된다. 만일 사람들이 여러 차례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았더라면, 또 만일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부활을 기원하고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성경에서 전하는) 안식일 다음 날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유사하면서도 또 다른, 그 ‘부활’을 인식할 능력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대목에서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을지라도, 우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정원지기의 목소리려니 생각했을 것이다.
축복과 진복(眞福)에 대해 노래하는 시편의 도입부, 제1장과 제2장을 거친 후에 시편 제3장에서부터 우리는 기도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편의 장章(제3장)은 다윗이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시편. 다윗. 그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서 달아날 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 제목을 삽입했던 그 시대의 서기(書記)는 다윗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예루살렘의 왕,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끔찍했던 시기 중에 하나였던 때, 곧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던 시기에 맟추어 이 기도의 시편을 배치해 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목을 붙인 것이 역사적으로 실제의 사실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시편의 이 제목은 아무튼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들을 전해 주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그 어떤 것도 버리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는 사무엘기 하권을 통해 – 멋진 머릿결을 지닌 매우 잘 생긴 왕자였던 –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해야 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모든 사람이 지나갈 때 온 세상이 목 놓아 울었다. 임금이 키드론 시내를 건너고, 사람들도 모두 그곳을 건너 광야로 난 길을 향하였다.” (2사무 15,23)
이는 거꾸로 가는 탈출기, 곧 부활을 향해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수난을 향해 도피하는 것이었다.
“다윗은 올리브 고개를 오르며 울었다. 그는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걸었다. (…)” (2사무 15,30)
이는 모든 왕 중에 가장 사랑받았던 왕이었던 다윗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곧 고난의 길, 슬픔의 길, 십자가의 길이었다.
바로 이 같은 맥락 속에 시편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주님, 저를 괴롭히는 자들이 어찌 이리 많습니까? 저를 거슬러 일어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저자를 구원하실 성싶으냐?” 저를 빈정대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시편 3, 2-3)
우리는 지금 이 구절에서 시편의 저자가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과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장면을 접하게 된다. 이 구체적인 어려움 안에서, 또 이와 같은 두려움 속에, 시편 저자, 그 본인의 내면에는 종교적인 질문 하나도 넌지시 들어서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시련들이란 단지 물질적인 시련들만은 결코 아니다. 바로 그 시련의 종교적, 영성적 의미야말로 그 시련이 매우 심각한 것, 또 종종 끔찍한 무언가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적 인간은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 그렇게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심판이라고 해석되는 고통이나 죽음, 따라서 윤리적인 단죄라고 여겨지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워한다.
따라서 그 죽음의 위협은 시편 저자의 삶이 정의로운가에 대한 질문이 되고, 이는 “하느님께서 저자를 구원하실 성싶으냐?”라는 질문처럼 바로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비非구원 상태는 성경에서는 지옥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장차 다가올 미래의 삶에나 있으리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즉, 성경의 세계에서는 천국이 태양 아래에 있으며, 약속의 땅은 우리 지구의 일부인 것이다.
구원이 없다는 것은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야훼(YHWH)*는 어리석은 우상이 아니라, 참된 하느님이신데, 그 이유는 구체적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훼(YHWH) 하느님은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만일 야훼 하느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 사람이나 그 백성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느님의 개입이라는 은총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야훼(YHWH)
네 개의 자음자 YHWH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주님의 고유한 이름. 그리스어 번역본을 살펴보면 YHWH는 야훼(Yahweh)로 발음해야 옳다고 판단된다. 이와 달리 여호와(Jehovah)라는 발음은 고대 유태인 공동체에는 미지의 것이었으며, 이는 후기에 와서 자음자 YHWH에 아도나이(Adonai, 주님)의 모음자를 인위적으로 갖다 붙임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탈출기(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동사 ‘있다’(qal)의 형태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문법적으로 ‘야훼’는 이 동사의 원인을 나타내는 형식이어서 "그는 있도록 한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존재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호세아는 오직 탈출기(출애굽기) 시대부터 하느님이 ‘야훼’라 불려졌음을 암시한다(12:9, 13:4). 유배기 이후 야훼란 이름은 부르기가 황송하였고, 인격적인 이름을 가진 잡신들과 구별하며 불경죄를 범하지 않으려는 일념에서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Elohim)으로 대신 불렀다. – 출처: [가톨릭대사전]
하느님의 침묵은 어떤 사람이 유죄임을 알리는 표시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이사 53,4)
우리는 (구약성경 『욥기』에서) 욥이 그 당시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 또한 성경의 몇몇 부분들에도 많이 나오는 - 이와 같은 종교적 개념에 대해 도전하고자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하느님의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고자 했던) 그의 친구들과 욥이 벌였던 신학적, 윤리적 논쟁, (그리고 하느님 당신께도 질문을 던지며) 욥이 벌였던 신학적, 윤리적 논쟁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도전을 시편 제3장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시편 제3장에서 행간行間에 숨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의미, 곧 어떤 다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금 다윗 왕의 역사와 그가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야 했던 스토리로 돌아가야 한다.
다윗 임금이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을 때, «사울 집안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그곳에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은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는 나오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온 백성과 모든 용사가 임금 좌우에 있는데도,) 그는 다윗과 다윗 임금의 모든 신하에게 돌을 던졌다. 시므이는 이렇게 말하며 저주하였다. “꺼져라, 꺼져! 이 살인자야, 이 무뢰한아! (사울의 왕위를 차지한) 너에게 주님[야훼, YHWH]께서 (그 집안의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돌리시고,) 그 왕위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주셨다. 너는 살인자다. 이제 재앙이 너에게 닥쳤구나.”» (2사무 16, 5-8)
이것은 끔찍한 비난이 아닐 수 없다. 시므이는 압살롬이 다윗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것을, 다윗이 자신의 ‘아버님’, 곧 주군(主君)이었던 사울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던 것에 대해 응징 보복하는 벌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고, 시므이가 돌을 던지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면서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배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목숨을 노리는데, 하물며 이 벤야민 사람이야 오죽하겠소?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2사무 16, 11)
삶이 우리에게 돌을 던질 때, 혹은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질 때, 이보다 더 지혜롭고 온유하게 그 의미를 해석하는 법은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다윗을 통해 불행한 일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재발견하게 된다.
시편 제3장의 히브리어 원본에는 3절 끝에 ‘셀라’(selah)라는 단어가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뜻은 “잠시 멈춤”이다. 즉, 시편의 이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 혹은 성전에 모인 공동체나 후대의 유대교 회당에 모인 공동체, 곧 회중(會衆)으로 하여금 - 잠시 낭독을 멈추며 숨을 돌리고 나서, 시편의 노래를 계속 읽어 나가도록 초대하고 있다.
“셀라(selah)라는 자그마한 단어는 낭독하거나 노래하지 않는 단어인데, 이는 해당 구절이 뜻하는 바를 잠시 침묵 중에 머무르면서 묵상할 것을 권고하는 말이다. 곧, 마음으로 묵상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
우리 역시 여기서 잠시 멈추면서 숨을 고르도록 하자……. 이 침묵이 만들어 주는 내면의 공간 안에서, 우리도 (성경의 다윗처럼) 예루살렘에 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도 다시 (다윗과 함께) 키드론 시내를 건너, 올리브 고개에 도착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다음, 우리는 다윗의 후손 중에 하나인, 또 다른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과 함께 길을 가보고자 한다. 그는 지금 그 도시(예루살렘) 밖에 있으면서 (‘골고타’라고 하는) 또 다른 산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길에서) 나중에 결국 시편 제3장에 나오는 구절들과 매우 비슷한, 너무도 비슷한 다음과 같은 말들을 다시 듣게 된다.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마태 27, 43)
그런데 이 소리를 듣는 그 사람 역시 자신을 저주하는 원수들의 말을 막지 않는다. 그때에도 역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하느님께로부터도 버림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다음과 같은 크나큰 두려움이 몰려왔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태 27, 46)
그러면 이제 시편을 계속 읽어보도록 하자.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를 에워싼 방패, 저의 영광, 저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해 주시네.” (시편 3, 4-5)
큰 소리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나에게 응답해 주신다. 인간 다윗의 내면에는, 또 나자렛 사람 예수의 내면에는 이 고통이 (혹은 이 박해, 이 버림받음이) 혹시 하느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일어난다. – “주님께서 (그로 하여금 나를 저주하도록) 그에게 명령하신 것일 것이다.”
다윗과 나자렛 사람 예수는 당시 모든 것이 상징이었던 세계, 또 모든 것이 신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던 문화권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입장에서 인간의 고통들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성경은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 것들 중에 잘못된 메시지들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무엇보다도 성경은 그와 같은 ‘해방’을 뜻한다. 이 시편은, 우리가 버림받음에 대해 부르짖으면, “주님은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나 자리에 누워 잠들었다 깨어남은 주님께서 나를 받쳐 주시기 때문이니 나를 거슬러 둘러선 수많은 무리 앞에서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시편 3, 6-7)
이것은 격렬한 전투 한가운데에서도 엄마 품에 안겨 안심하고 평온한 모습으로 잠드는 갓난아기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성경은 인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시편 제2장). 한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것이 그가 악한 자이기 때문이건, 혹은 인생의 이런저런 사건들 때문이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한다. 만일 그것을 해내지 못할 경우에는, 아버지는 그 아들 곁에 남아 그 아들과 함께 죽는다. 아버지들은, 아들을 처형하기 위한 처형대(處刑臺)를 마련하는 군사들 편에 있지 않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정체성과 부성애(父性愛)는 십자가에 못 박힌 자녀들로 하여금 그 십자가에서 벗어나도록 못을 뽑아내 주는 놀라운 기술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단지 추상적인 정리(定理), 곧 이미 진리라고 증명된 일반 명제에만 불과한 것이 아니라면, 성토요일의 첫 번째 스따밧(stabat)*, 곧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시는 고통 속의 존재는 아버지, 곧 성부(聖父)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는 수난과 부활은 인간적인 고통에 대한 찬미도, 정당화도 아니다. – 성경을 읽는 그 어떤 사람이든 이데올로기 없이, 복음서의 그 구절들에 다가갈 때, 거기에서 단지 무고한 한 사람이 겪는 불의한 고통의 이야기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무고한 사람은 그 모든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스따밧(stabat)
원래 라틴어 ‘스따밧 마떼르’(Stabat Mater)는 십자가 아래에서 비통하게 통곡하는 성모 마리아의 슬픔과 비애를 묘사한 찬미가의 라틴어 제목(‘어머니께서 서 계셔서’를 뜻하는 첫 두 단어)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이 찬미가는 십자가의 길 기도의 대중 신심에서 널리 사용된다. 마리아가 십자가의 희생 제사에 현존하고 참여하며 함께 고통받는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함께 나누고 봉헌하는 교회의 신비의 일부이다. [가톨릭 전례사전 참조]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따밧 마떼르’ 대신, 아버지, 곧 성부(聖父)가 그 자리에 있는 모습으로 저자는 묘사하고 있다.
성부(聖父),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와 더불어 바로 그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다시 읽어내시고 다시 살아내신다. 그분은 매번 아들의 부르짖음을 다시 들을 때마다, 고통을 느끼신다. 아들의 부르짖음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로지 마지막 날에야 비로소 그 소리가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성부(聖父)는 그 아들이 마치 또 다른 시지프스(Sisyphus)*처럼 매일 똑같은 십자가의 길을 다시, 또다시 가곤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울듯이 그분도 우신다.
* 시지프스(Sisyphus)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 ‘시지프스’는 저승에서 무거운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 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았는데, 그가 힘겹게 꼭대기까지 바위를 겨우 밀어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져 내렸고, 그는 이런 노역을 영원히 계속 되풀이해야 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시지프스의 이러한 고역(苦役)은 인간 존재가 직면하게 되는 실존적 부조리의 상황을 상징한다고 했다. 국내에서는 ‘시지프스’를 시시포스(Sisypos, Sisyphus)라고도 표기한다.
바로 그 무한한 골고타들의 꼭대기에서 또 다른 놀라운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시편 구절에 담겨 있다.
“일어나소서, 주님(YHWH). 저를 구하소서, 저의 하느님.” (시편 3,8)
잠을 자는 것, 곧 수면 후에는 깨어남이 있다. 죽음 후에는 부활이 있다.
“아마도 너는 치명적인 고요함의 이미지이기에, 그래, 나에게는 사랑스러운 존재여, 오너라, 오, 저녁이여.” (우고 포스콜로 Ugo Foscolo)
하느님의 부활하심은 우리의 부활을 알리는 첫 열매이다. 우리 역시 부활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부활하셔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밤이 지난 후에 하느님께 일어나시라고, 죽음 후에 부활하시라고 큰 소리로 청하는 것이, 으뜸가는 기도가 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시편의 첫 번째 기도에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기도를 발견하게 된다. 즉, “하느님, 일어나소서, 다시 일어나소서, 부활하소서, 당신께서는 부활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이 끝없는 성토요일에만 버려두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기도이다.
“하느님, 간구하나이다, 부활하소서.”라는 기도, 이것보다 더 인간적인 기도는 없을 것이다. 이는 믿는 이의 기도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잃어버린 이의 기도이기도 하다. 또한 믿는다는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는 사람, 곧 하느님의 죽음 후에도 다시 믿기 시작하고픈 사람의 기도이기도 한다.
수세기 동안, 시편의 성가대들은 큰 소리로 하느님께 부활하시라고 간구하곤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식일 밤에 무덤 앞에서 기도하며 기다림 속에 있었던 이들 중에는 아벨, 디나, 하갈도 있었음을 상정(想定)할 수 있을 것이다. 욥, 리츠파, 나봇, 입타의 딸 등 성경에 나오는 모든 희생자들도 그 무덤 앞에 함께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부활 안에는 그들의 기도 역시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우리의 기도가 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끊임없이 그분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곧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다시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분께 다시 부활하시라고 기도드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분의 죽음들보다 그분의 부활들이 더 많아지기를 간절히 청하는 기도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 적어도 죽음보다는 부활이 하나 더 많아지기를 기도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l.bruni@lumsa.it
* 관련 성경 장절 참조
아벨: 구약성경 『창세기』 4장 1절-16절
디나: 구약성경 『창세기』 34장 1절-31절
하갈: 구약성경 『창세기』 16장 1절-16절, 21장 1절-20절
욥: 구약성경 『욥기』 (전체)
리츠파: 구약성경 『사무엘기 하권』 21장 8절-11절
나봇: 구약성경 『열왕기상』 21장 1절-19절
입타의 딸: 구약성경 『판관기』 11장 30절-40절
이태리어 원본 기사 전반부 (국제 EoC 홈페이지)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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