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oC 기업 ‘지식백과’ 소식 12호
EoC기업과 보조성(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병기 교수
<지식백과> 소식 3호에서, 아가페가 가장 숭고한 사랑의 종류라고 하였다. 완전함에 대한 본원적 욕구를 충족하는 에로스나, 넓은 의미의 우정을 가리키는 필리아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호혜적 교환’이라는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EoC 기업의 무상성(無償性, gratuitousness)이야말로 인간이 실천하는 아가페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EoC 기업이 고려해야 할 사랑의 실천 활동 간의 우선순위라는 측면에서 보조성(보충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은 개인-제도 간, 제도-제도 간의 역할 분담을 정할 때 적용되는 기준으로서, 역할 분담의 우선순위에 초점을 두는 ‘소극적 보조성(보충성)의 원칙’과, 그러한 역할 분담 체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치유와 관련한 ‘적극적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소극적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이란 역할 분담의 우선권이 개인 또는 하위 제도에 있다는 것으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제도가 침해해서는 안 되며, 하위 제도가 할 수 있는 일을 상위 제도가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개인(민간 부문)이 할 수 있는 일을 정부(공공 부문)가 나서서는 안 되며, 지방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을 중앙 정부가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개인의 존엄성과 지역 공동체의 독자성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적극적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은, 소극적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이 기초하고 있는, 개인이나 하위 제도의 능력과 여건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전제가 파생시키는 ‘과도한 격차의 문제’를 치유하고자 한다. 즉, 개인이나 하위 제도 간의 격차가 사회 전체의 통합과 발전을 저해할 정도로 극심하다면, 이에 대해 상위 제도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과도한 격차를 해소하는 조치를 보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 간 극심한 빈부 격차나 극단적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한 중앙 정부의 소득 재분배 정책이나 국토 균형 발전 정책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은 EoC 기업이 고려해야 할 사랑의 실천 활동 간의 우선순위 측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브루니교수는 『콤무니타스 이코노미』 161쪽에서, “계약(제도)은 우정(필리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 것, 그리고 우정(필리아)은 사랑(아가페)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 것”이라고 요약해서 표현하였다. 즉, 우정(필리아)은 사랑(아가페)의 보조적 도구일 뿐이며, 계약(제도)은 우정(필리아)의 보조적 도구일 뿐이다. 그래야만 사람의 가치와 관계의 가치를 높일 수 있고, 사회의 품격을 더욱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브루니교수는 『콤무니타스 이코노미』 257쪽에서 보조성(보충성)의 원칙을 사회적 협력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과 같이 사람들과 가까운 카리스마를 지닌 사회 조직이 혁신에 앞장서서 새로운 요구들을 찾아내고, 프로젝트의 실현을 위해 제도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중략) 그러나 흔히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제도는 ‘경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필요’를 찾아내고, 시민 단체는 이러한 경쟁에 참가함으로써 응답한다. 이러한 시민 사회 조직들은 제도/기관이 경쟁 입찰에 부치는 계약을 따낼 수 있는 쪽으로 진화하면서, 사람을 고용하고 해고한다.”
우리 사회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숨가쁜 노력의 최일선에서, 굳이 국가나 지방 정부의 역할과 지원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에 우선하여 시민적 동태성 내에서 카리스마의 우월적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EoC 기업이 정부가 개입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이미 보여온 ‘무상성無償性’과 ‘의도적 취약성’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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