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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거래와 믿음, 그리고 일용할 양식 -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의 예언

  • EoC Korea
  • 1일 전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14시간 전



경제와 종교 – 곡물이 ‘나눔과 친교’(communion)가 될 때: 이탈리아 농촌 지역에서 근본적인 바탕이 되어준 기관들의 기원을 찾아서


글쓴이: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지誌 2025년 4월 16일자에 게재

 

“저의 외할머니께서는 문맹이셨어요. 하지만 커다란 집 하나를 운영할 줄 아셨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아셨으며, 기도할 줄 아셨지요.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함께 이른 새벽의 첫 미사에 참례하곤 했어요. 할머니께서는 미사에 앞서 거의 반 시간 정도 묵상을 하곤 하셨는데, 결국에는 저도 그 모든 묵상들을 외우게 되었어요. 할머니께서는 그 묵상들을 전부 암기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      쥬세페 데 루카 신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나의 스승인 알퐁소 성인』, 1963년.

 

오랜 세월 전의 이 ‘곡물 은행들’은 신용 대부(貸付)와 신뢰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을 들려준다. 이는 곧 공동체적이고 연대적인 현실이자, 그리스도의 몸, 즉 성체(聖體)와 연결된 현실이었다. 또한 문맹이었고 가난했지만, ‘합리성’이라는 책을 잘 알고 있던, 한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이탈리아의 시골과 산악 지역에서의 삶은 매우 힘들었고, 짧았으며, 가난했다. 그곳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맹이었고, 여성들은 노예 상태에서 살았으며, 가정들은 평균 15명 이상의 식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중에 소수의 식구들만이 살아남아 성인의 연령대에 도달하곤 했다.

“이 동네에는 몇 가구가 있나요?”

“열여섯 가구요.” 

“그럼 몇 명이 있지요?” 

“300여 명이요.” 


(출처: 라이[Rai] 방송 다큐멘터리, 『이탈리아에서의 여행』, 1960년대)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맥락에서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의 너무도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가 전개되었는데, 바로 이 역사에 대해 우리는 이 시리즈 기사들을 연재하고 있고, 많은 독자들의 열정과 참여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는, 널리 확산된 대중적인 연구를 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연구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는 다음과 같은 웹사이트에서 이태리어로 찾아볼 수 있다. https://www.pololionellobonfanti.it/notizie/riscopriamo-insieme-i-monti-frumentari/)

 

우리는 이 작고 특별한 금융 기관들과 이 ‘곡물 은행’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은행들이 정말로 어떤 존재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기관들과 은행들은 교회의 역사적 기억에서도 전적으로 잊혀진 상태여서, 그 기관들과 은행들이 존재했던 시기와 장소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당시 바위 사이에도, 웅덩이 가까운 곳에도 경작되지 않은 땅이라고는 몇 평방 미터도 없었다. 또한 경작을 해도, 수확은 늘 빈약하고 메마른 땅들이었다. 그곳 주민들은 도시의 오래된 성벽 외곽에 형성된, 넓은 교외 주택 지역인 ‘보르고(borgo)’에서 살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빈곤한 마을들에서 겨우 생존해 가곤 했다. 이러한 여건은 적어도 2차 세계대전 후까지 이어졌다. 배고픔은 흔히 접하게 되는 현실의 여건이었는데, 여기에서부터 – 아직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는 생생히 남아 있는 전통인, - 몇 시에 도착하든 손님들에게는 무언가 먹을 것을 주는 관습이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을 절대 빈곤의 세계 안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 안에서는 그 마을 성당의 주임 신부들이 종종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작은 은행가가 되어, 대부금(貸付金)과 부채, 신용거래, 안전(보증), 장부, 소송 등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아직 반(反) 종교개혁의 반(反) 근대적인 문화와 사고방식에 온통 잠겨 있던 그 (가톨릭) 교회가 오히려 신용거래의 관점에서 미래와의 경계선상에 있게 된 것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인 농민들과 농노들이 배웠던 첫 번째 근대적인 단어들은 신용거래에 관련된 단어들, 즉 믿는다는 것, 신뢰와 빵 상자를 의미하는 신용에 관련된 단어들이었다. 이미 1700년대의 텍스트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라는 명사는 (이와 관련해서) 그들이 알게 된, 맨 처음의 이태리어 단어들 중 하나였다. 당시 그 어떤 이태리어 사투리에서도 곡물을 프루멘토(frumento)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 예를 들어 아스콜리 피체노(Ascoli Piceno) 지방 사투리로는 곡물이 루라(lu ra’)였다. - 그들은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라는 이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단어의 좋은 본질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의 농경 세계는 성체(聖體)와 연결된 문화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너무 어려운 신학은 아니었다. 그들의 ‘연민과 자비’(pietà)는 성체(聖體)와 연결된 ‘연민과 자비’(pietà)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연민과 자비’(라틴어로는 피에타스 pietas)는 덕을 닦는 수덕(修德)과는 별로 일치하지 않으며, 신비주의와도 별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신앙심이나 기도와도 별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민과 자비’는 ‘애덕, 사랑’(caritas)과 일치합니다.”


-      쥬세페 데 루카 신부 Don Giuseppe de Luca, ‘연민과 자비’(pietà)의 역사에 대한 이태리어 문서고, I, p. xxiii

 

가난의 세계에서 빵이란 생명과 특별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또한 씨앗이 죽고 부활하는 것처럼, 빵도 제단 위에서 죽고 부활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통찰했다. 그 농부들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1]을 조금밖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라틴어도 잘 몰랐지만, 그들 모두가 빵은 선물이고, “땅의 결실이자, 인간 노동의 결실”[2]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사도신경의 신앙 고백 내용을 좀더 길고 장엄하게 암송하는 신앙 고백 기도문, * 옮긴이 주


[2] 가톨릭 미사 경본 중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라는 구절 참조. * 옮긴이 주



성체(聖體)는 마치 불을 쬐면 글씨가 드러나는 은현(隱現)잉크로 적힌 것 같이, 그들의 매일의 삶에 새겨져 있었다. 이는 중세 독일의 한 오랜 기도문에서 다음과 같이 낭송되는 대목과도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주에 의해 씨앗처럼 심어지셨네. 싹이 트고, 자라나 무르익었고, (추수[秋收] 때가 되어) 베어져 거두어들여지시고, 단으로 묶이어, 타작마당에 옮겨지셨네. 타작되시고, 체로 쳐지시어, 잘게 빻아지셨네. 화덕에 갇히신 후 3일 만에 밖으로 꺼내지시어 빵처럼 먹혀지셨네.” 


-      데 마르티노(De Martino), 『오래전 세상에서의 죽음과 장례 예식 중의 비탄』, 1958년 발간, 이태리어 원본 343쪽.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은 백성들의 이러한 성체(聖體) 신심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 (당시 이탈리아) 백성들은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지극히 거룩한 성사(聖事)’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는 마치 모든 성사(聖事)들이 성체성사에 쓰이는, 누룩 없이 만들어진 둥근 밀떡인 그 제병(祭餠) 안에 요약되어 있는 것처럼 말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주교에 의해 축성된 기름으로 교회 전례에 사용되는) 성유(聖油)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세례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빵에 대해서는 모든 이가 이해하고 있었다. 즉, 십자가에 못 박힌 분, 그리스도를 그 거룩한 제병(祭餠, host, 성체로 축성되는 희고 얇은 둥근 밀떡)에 연결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 시대 상인들이 사용하던 건물들 중에 가톨릭교회에 속한 건물들 가운데에는, 그 작은 ‘몬테 프루멘타리오’도 있었기에, 성체(聖體)에 대한 경험은 더욱 심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용거래를 통해서도, 신용한다는 것을 통해서도, 즉 본당 주임 신부와 성당이 그 본당의 가정들에 대해 가졌던 신뢰를 통해서도, 곡물은 빵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바로 이 가정들은 미사 중에 그 곡물을 성체성사에 쓰이는 빵의 형태로 다시 만날 때, 마치 그것이 같은 집 식구 중에 하나인 것처럼, 그 집에 딸린 허드렛일 하는 식솔인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제병(祭餠, 밀떡)은 (성체[聖體]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領聖體]를 통해) ‘나눔과 친교’(communion)가 되곤 했고, ‘몬테 프루멘타리오’의 곡물은 미사 후 평일에 이 같은 ‘나눔과 친교’(communion)를 키워 나가고 구체화시키곤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우리는, 아스콜리(Ascoli)의 주교가 (오솔리Osoli) 마르시아(Marsia)읍에 속한 어느 작은 촌락의 ‘몬테 프루멘타리오’를 사목 방문한 일에 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게 될 때,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곡물을 빌려간 채무자는 정해진 때에 (빌려갔던 곡물을 되갚으면서, 단지 빌려갔던 양만큼만이 아니라,) [이자에 해당하는] 증가분의 곡물도 포함해서 함께 유효한 종류의 곡물을 몬테의 창고에 다시 가져와야 합니다. 이자에 해당하는 증가분의 곡물은 관례에 따라, 지극히 거룩한 성사(성체성사)를 위한 감실(龕室, 가톨릭교회에서 성당 안에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聖體]를 모셔둔 곳. * 옮긴이 주)에 쓰이는 밀랍 초를 사는 데 쓰입니다. 그 어떤 채무자이든 법적으로 정해진 이러한 그의 의무를 8일 내에 이행하도록 통보받은 후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향후 더 이상은 몬테에서 곡물을 빌려갈 수 없도록 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멋진 기록물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가 부각된다고 하겠다.  

(a)  빌려간 곡물들을 되갚는 방식들의 운영과 관련해 그 주교가 본당 주임 신부와 그의 담당 책임자들에게 엄격하게 당부했다는 점

(b)  이자(빌려간 곡물을 되갚을 때, ‘더 많은 분량’을 내놓는 것)에 해당하는 몫을 성체(聖體)를 모신 감실 아래 놓는 밀랍 초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한 점

 

때때로 ‘몬테 프루멘타리오’들은 연간 실적이 특히 어려울 때, 전적인 희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그 동일한 보고서에 나오는 가이코(Gaico)의 몬테에 관한 기록에서도 보았고,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몬테의 장부를 보고 나서, 1834년도의 곡물 대여(貸與) 자본을 1824년도에 모인 액수에 비해 정확히 30 콰르타(quarta) [약 750리터] 올릴 것(증가시킬 것)을, 그리고 담당 직원 한 명의 급여를 더 책정할 것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곡물을 빌려갔던 사람들이) 증가분들을 (즉, 이자를) 지불하도록 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본을 증가시킬 희망이 없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그 주교는 이러한 실행 방식을 바로잡을 것과, 곡물을 대여받고 되갚을 때 이자와 함께 되갚는 관례를 부활시킬 것을 다음과 같이 명령했던 것이다.

“새로 곡물 대여를 시작하기 전에, 담당 책임자의 계산들에 맞게 되갚았는지 확인해야 하고, 수령증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는 곡물 대여 예약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자 없이 곡물을 대여해 주는 것이나, 되돌려받지 않고 곡물을 내주는 것은 주교가 ‘특별한 교서를 통해’ 전적인 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예외적인 경우들에 국한되었다. 하지만 몬테들의 규칙은, 곡물 대여량이 (몬테 자체에) 부담이 될 정도로 많이 대여해 주는 것이었고, 연간 약 5%의 적당한 이자율과 함께 이를 되갚으면 되는 것이었다. – 이자는 곡물을 담는 콰르타(quarta, 약 25리터) 용기 입구가 ‘편평하게(raso)’ 담는 것과 ‘가득 넘치게’ (colmo) 담아 되갚는 분량 사이의 차이에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두 번째 세부 사항이 있다. 이 문서에서 우리는, 이자 명목으로 들어오는 곡물이 감실(龕室, 가톨릭교회에서 성당 안에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聖體]를 모셔둔 곳)의 초를 만드는 데 쓰이는 밀랍을 구입하기 위해 판매되었다는 것을 읽게 된다. 이는 또다시 집에서 먹는 빵과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에서의 빵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빵), 두 가지 빵을 경이롭게 엮어내는 하나의 스토리로서, 이러한 초기의 (곡물) 은행들의 이자가 지녔던 본질에 숨어 있는 놀라운 뿌리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그 신용 대부(貸付), 그 믿는다고 하는 것, 바로 그 ‘피데스(fides, ‘믿음’, ‘신용’를 뜻하는 라틴어) – 신뢰’가 대부(貸付)한 것들로부터 이자를 창출하게 했고, 그 이자는 또 다른 믿음(지극히 거룩한 성사 – 성체성사)에 빛을 비추어주고, 그 믿음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일한 믿음, 동일한 삶의 두 가지 얼굴들, 공동체와 영성체의 맛있는 동일한 빵이 지닌 두 가지 얼굴들이었던 것이다. 그 믿음과 그 신용 대부(貸付)는 경제와 종교, 창고와 미사 제대를 서로 연결해 주었다. 또한 경작지에서의 수고와 미사 때의 성체성사적인 축제의 기쁨, 그리고 가정 경제와 구원 경륜(救援經綸, l’oikonomia [the economy] of salvation)을 서로 연결해 주었다. 그 몬테를 운영하던 형제회(평신도 협회)는 ‘지극히 거룩한 성사(성체성사)의’ 형제회라고 불렸는데, 마침내 우리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겠다.   

 

나의 유년기에 첫 번째로 다가왔던 종교적 이미지들은 성체축일(corpus domini), 곧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의 (길게 늘어선) 행렬들이다. 여성들은 꽃 장식, 형형색색의 수천 개의 꽃잎들을 준비하곤 했는데, 이 꽃잎들로 길을 따라 이어지는 거대한 제병(祭餠) 모양의 꽃 무늬들과 성작(聖爵, chalice, 성체성사 때 그리스도의 성혈이 되는 포도주를 담는 잔) 모양의 꽃 무늬들을 꾸미곤 했던 것이다. 분명히 그 축일은 그들 나름대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몸, 곧 성체(聖體)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농민들의 집합의식(集合意識 , collective consciousness,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신념과 감정 체계) 어딘가에는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도 있었으니, ‘나눔과 친교’(communion)를 이루는, 바로 그 또 다른 곡물과 빵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잘 알고 있던 바이기도 한데, 그들은 그 동일한 세기들에, 서민들을 위한 소액대출은행인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 한 곳을 설립할 때면, 성당에서 몬테 본부까지 이어지는 긴 행렬을 통해 이 은행의 출범식을 거행하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 행렬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들, 곧 평신도들의 특성을 전적으로 지닌 것이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영성적인 특성을 지닌 것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몸, 삶, 피(혈액), 곡물, 밀이 지닌 향기, 형형색색의 꽃잎들로 표현되는, 경제와 금융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곡물 낟알의 냄새를 잊어버리면서, 돈의 본질과 소명, 은행들과 신용 대부의 본질과 소명도 잊어버린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오래전의 이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 한 곳에서 다시 발견된 장부들과 관련해서, 또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세부 사항, 진짜 보석과 같은 사실이 하나 있다. 산 쟈코모(San Giacomo) (그리고 콜레이아노[Colleiano])의 몬테에 관련된 1838년의 한 기록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읽게 된다.


“너무도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몬테 프루멘타리오’가 소홀히 운영된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로 “1831년에 곡물 대여(貸與)가 38 콰르타(quarta) [약 950리터]로 올랐는데, 1835년에는 단지 17 콰르타(quarta) [약 425리터]에만 이르렀다. 이로부터 곡물 대여(貸與) 후에 매년 몬테에 실제적으로 되갚고 있지 않다는 것을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효율적인 상황을 보면서, 아스콜리(Ascoli)의 그레고리오 쩰리 야코부찌(Gregorio Zelli Jacobuzzi) 주교는 중요한 무언가를 추론해내게 되고, 실제로 다음과 같이 편지를 적어 보내는데, 그 내용은 그곳 산 쟈코모(San Giacomo) 몬테에서는 “(곡물을 대여해 주고 나서 나중에) 증가량들(이자들)을 받을 때, 기본 자본에 해당하는 분량을 포함시키지 않고 받는, 고리대금 방식의 남용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주교는 “이러한 심각한 손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6개의 시행 규칙들을 이행할 것을 명한다. 따라서 고리대금에 해당하는 행위란 (곡물을 대여해 주고 나서 나중에) 기본 자본에 해당하는 분량을 되갚도록 하지 않은 채,  이자에 해당하는 분량만을 되돌려받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일종의 고리대금업 시스템이리고 보았던 이유는, (곡물을 대여받고 나서 나중에) 기본 자본에 해당하는 분량을 되갚지 않으면, 그 분량이 탕감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곡물 대여 시 필요한 새로운 기본 자본에 그 손실액만큼 부담액으로 합산되고, 이는 다시 점점 늘어나는 부채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을 일으켜 (당시 농촌의) 가정들에게 (이러한 곡물 대여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이와는 달리 몬테들의 좋은 규칙은 되갚지 않는 사람에게는 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이는 바로 고리대금의 악순환이 촉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가난하고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인들의 세계였지만, 대부(貸付)의 근본 규칙과 시민경제적인 신용거래의 근본 규칙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세계이자, 합리적으로 사고할 줄 알았던 세계였고, ‘합리성의 책’을 잘 알고 있었던 세계였던 것이다.

 

쥬세페 디 루카 신부(Don Giuseppe di Luca)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그는 한 권의 책을 그의 친구(이며 나의 친구)인 한 자매에게 헌정하면서, 성체성사의 의미가 담긴, 부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또 다른 구절을 적었다.


“비올라(Viola)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결코 죽지 않으면서도, 매 순간 항상 다시 태어나기를 축원하면서,”


부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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