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이 아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은행. 마르코 다 몬테갈로(Marco da Montegallo)의 비전.
- EoC Korea
-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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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600주년 기념일을 맞아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신용거래의 현실들을 일구어낸 한 가톨릭 수사를 기억하다
글쓴이: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이탈리아 가톨릭 일간지 아베니레(Avvenire)지誌 2025년 3월 15일자에 게재
여러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i Frumentario)』[1]들이나 『몬테 디 피에타(Monti di Pietà)』[2]들로 대표되는 프란치스코회의 예언자적인 시선은 오늘날의 경제에는 하나의 도전이다. 돈을 빌려 줄 때, 유일한 ‘이자’는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라는 이자이다.
[1]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는 이태리어로 ‘곡물 은행’라는 뜻으로, 가난한 농부들을 위해 곡물과 종자, 기타 물품들을 나누어 주던 곳이었다. 15세기 말에 태어나, 프란치스코회 수사들과 몇몇 성직자들의 후원 속에 16세기, 17세기에 이탈리아 곳곳에 확산되었다.
[2] 몬테 디 피에타(Monti di pietà)는 15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한 『소액 대출 은행』으로서 서민들이 담보로 물건을 맡기면 매우 저렴한 이자로 급전을 빌려주곤 했다.
1496년 3월 19일 (이탈리아) 비첸짜(Vicenza)에서 복자(福者) 마르코 다 몬테갈로(Marco da Montegallo)가 선종헀다. 그는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과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들의 지칠 줄 모르는 창설자였다. 그는 (아스콜리 피체노 Ascoli Piceno 지방의) 몬테갈로(Montegallo)에서 1425년에 태어났다. 올해 3월 19일 (아스콜리 피체노 Ascoli Piceno 지방의) 발레다콰(Valledacqua)의 수도원에서 그의 탄생 600주년을 기념한다. 그 기회를 통해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예정이고, 기둥과도 같은 이 기관들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파제세(Paggese)의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 한 곳도 방문할 예정인데, 1500년대의 오랜 ‘몬테 프루멘타리오’ 본부 건물이었던 이곳을, 여러 ‘몬테 프루멘타리오’들에 대한 연구 센터나 박물관으로 출범시키고자 하는 원의도 있다.
마르코 다 몬테갈로(Marco da Montegallo)라는 이름은 『몬테갈로(Montegallo) 출신의 마르코』라는 뜻으로, 몬테갈로의 옛 지명은 주조(鑄造)하던 곳으로 알려진 ‘산타 마리아 인 라피데’(Santa Maria in Lapide)이다. 마르코 다 몬테갈로는 프란치스코회 정신을 실천한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작은 형제회의 엄격한 규칙을 준수한 수사이다. 마르코 수사는 인본주의자이자 신학자였고 의사였는데, 무엇보다도 특히 가난한 이들과 공동선(共同善)을 위한 여러 은행들을 설립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다음과 같은 추도사가 있었다. “당신 덕분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도시들에서 몬테들[『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들과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들』이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이들을 속박으로부터 풀어주기 위해 ‘몬테 디 피에타’들을 설립하셨습니다.” [비첸짜(Vicenza)]
마르코 수사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이고, 전적으로 프란치스칸 영성적이며, 전적으로 인간적인, 자신의 ‘마니피캇’을 통해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고자”(루카 복음 1장 52절 참조) 이러한 몬테들을 설립했다. 가톨릭교회에서 덕행을 인정받아 시복(諡福)되면서 복자(福者)가 되기도 한 ‘마르코 다 몬테갈로’ 수사의 인물상은 경제학자인 나에게 매우 의미 있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곧, 마르코는 (이탈리아) 비첸짜(Vicenza)의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를 지지해주었다. 이는 경제와 금융이 공동선(共同善)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삶으로 살아낸 것이 될 때, 경제와 금융보다 더 영성적인 것은 없음을 - 우리가 이것을 망각했기 때문에 –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문학 작품 중에 가장 중요한 작품은 이태리어로 쓴 『건강 백서(健康 白書, la Tabula della salute)』이다. 이 책에 마르코는 여러 장(章)에 걸쳐 ‘몬테 디 피에타’들에 대한 내용들을 삽입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에서 발간된 이 책의 초판본에서는 – 루카 파리솔리(Luca Parisoli)가 ‘시민경제학 사전’에서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주목하도록 한 바와 같이 – ‘몬테 디 피에타’에 관한 장(章)들이 해당 인쇄업자에 의해 삭제되었다. 이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 가문의 한 귀부인이 자신의 부(富)의 일부를 대금업(貸金業) 업체 설립에 사용했었던 연고로, 고리대금업에 대한 이 책의 비판 내용들이 그 귀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백서(白書, Tabula)의 마지막 장(章)만 의학적인 내용이었다. 그의 의학은 다음과 같이 이 책의 서문의 첫 줄에 나오는 것처럼, 통합적인 건강, 시민 사회적 건강의 개념이었다. “사람의 신체의 건강, 이 지상에서의 건강 및 영적인 건강, 그리고 영원한 건강에 대한, 앞서 언급된 상회(商會) 관련 백서(la Tabula ditta&nominata)를 시작한다.”
마르코는 이탈리아 아스콜리(Ascoli) 출신의 유대인 선생인 에녹(Enoc)의 지도 하에 인문학과 의학 공부를 하고 나서, 페루지아(Perugia)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아마도 볼로냐(Bologna)에서 공부를 마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백서에는 『몬스 피에타티스(Mons Pietatis, ‘몬떼 디 피에타’의 당시 라틴어 표기 방식 중 하나)』라고 중앙에 찍혀 있는 활자가 눈에 띄었다. 바로 이 기관으로부터 여러 그룹의 사람들이 영감과 용기를 얻곤 했던 것이다.
아마도 마르코는 1458년 첫 번째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인 아스콜리(Ascoli)의 몬테를 설립하는 데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1470년 파브리아노(Fabriano)의 몬테 디 피에타, 예시(Jesi), 카메리노(Camerino), 안코나(Ancona), 그리고 비첸짜(Vicenza)의 몬테 디 피에타가 그 뒤를 잇게 되고, 마체라타(Macerata)의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e frumentario)』도 나중에 태어난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약 반세기에 걸쳐 100여 개의 몬테들을 설립했는데,) 이러한 ‘몬테 디 피에타’들을 설립한 다른 많은 수사들, 예를 들어 펠트레(Feltre) 출신의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수사, 테르니(Terni) 출신의 바르나바(Barnaba) 수사, 혹은 밀라노(Milano) 출신의 미켈레(Michele) 수사 등과는 달리, 마르코가 설립한 ‘몬테 디 피에타’의 독특한 점은 무료 대출이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몬테의 대부금(貸付金)에는 이자가 붙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르코의 첫 번째 목표는 고리대금업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는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는 대부(貸付) 방식을 제안했다. 마르코는 시에나(Siena) 출신 베르나르디노(Bernardino)의 노선을 따르면서, 당시 고리대금업이란 공동선(共同善)과 가난한 이들에 역행하여 야합하는 하나의 단합된 사회 계층의 행위라고 여겼고, 공증인들의 조합이 이에 공모(共謀)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투쟁은 유감스럽게도 마르코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배척하는 반(反) 유대주의적 어조도 사용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반(反) 유대주의적 태도는 당시 프란치스코회의 다른 많은 수사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던 오점이었다.

하지만 마르코는 (서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는 고리대금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몬테들의 직원들에게 급여를 주어야 할 합법적인 필요성은 인정하였고, 이러한 목적에 필요한 수입(收入)과 ‘이윤을 위한 수입(收入)’을 서로 구분해서 보았다. 마르코가 보기에는 몬테들이 향후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 대부금에 이자를 부과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자금원들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는 복합적인 논지(論旨)이자, 비판을 받는 논지이기도 했는데, 몬테들의 특수 목적은 돈을 빌려주는 것이어서, 재정적으로 유지되기 위해 (적당히 낮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 외에, 다른 별도의 방식들로 수익을 창출하는 자금원들을 상상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몬테의 대부금(貸付金)에 이자를 붙이지 않았던 무료 대출 방식은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프란치스칸 (영성) 운동 자체에 의해 폐지되었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칸 (영성) 운동은 대부금(貸付金)에 적당히 낮은 비율의 이자(연간 5%)를 부과하는 것이 합법적이라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자 대신 곡물로 되갚았던 『몬테 프루멘타리오(Monti Frumentario)』들에서도 ‘넘치도록 가득한’(colmo) 분량과 ‘편평(扁平)하게 채워진’(raso) 분량 사이의 차이점을 인정했다.
어쨌든 프란치스코회에서 생각했던 은행의 개념은 비영리적인(nonprofit) 기관이어야 하거나, 혹은 시민 사회적인 사업이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너무도 중요한 점이다. 은행의 사회적 목적은 이윤과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모든 사람이 담보나 보증 없이도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용 대부’(信用貸付)의 기본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오늘날에는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단지 예언자적인 메시지라고 하겠다. – 머지않아 도래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왕국에서는 은행들은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 아니라, 가정들과 기업들의 프로젝트들이 제대로 진행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며, 이윤은 목적이 아니라 운영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신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몬테들을 위한 자신의 활동의 근원을 마리아 영성의 몇몇 신비적 체험에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였다. (마르코는 성모 마리아 성지로 알려져 있고 전승에 의하면 나자렛 성가정 집이 보존되어 있다고 전해지는 이탈리아 로레토[Loreto] 관련 마리아 호칭 기도들을 작성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몬테들의 기원에는 마리아 영성적이고 여성적인 차원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몬테의 은행은 돌봄과 환대의 기관, 공동체에서 가장 취약한 인간관계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기관이자, 인내와 자비, 그리고 애끓는 모성애적 기관이 되고자 했다. 이런 측면들이 결여되면, 은행들은 복음에서 말하는 ‘매정한 종’[3]의 뒤를 잇는 모습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고 있으며, (아씨시의) 글라라 성녀도 살고 있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주인이 자신에게 만 탤런트나 되는 거액의 빚을 지은 한 종을 불쌍히 여겨 부채를 탕감해주었는데, 그 종은 자신에게 단지 백 데나리온의 소액의 빚을 지은 동료를 매정하게 대하며 그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자, 이 일을 알게 된 주인이 다시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을 다 갚게 했다는 복음서의 비유 이야기로, 형제에 대한 용서와 자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마태오 복음 18장 23절-35절 참조) * 옮긴이 주.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크나큰 위기와 경제적 사회적 변화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은행 기관들이 태어나게 함으로써, 이 시대적 징표에 응답했다. 그들은 단지 당시 존재하고 있던 은행들을 비판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새롭고도 다른 은행들을 만들어냈다. 전환의 시대에는 예전의 사업들에 대한 불평이나 비난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업들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칸 (영성) 운동은 자신의 가장 큰 보물인 청빈 정신에 대한 신뢰성을 잃지 않기 위해, 가능한 일들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일들까지도 수세기에 걸쳐 해왔다.
프란치스칸 (영성) 운동을 따랐던 이들은 교회 당국으로부터 단죄를 받거나 파문을 당하기도 했고, 이단(異端)들과 여러 실패들을 경험하였으며, 지나치게 순진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소유(sine proprio)의 정신이라는 그들의 카리스마(carisma), 즉 ‘성령의 특별한 은사’, 특은(特恩)에 충실하게 남아 있으려고 노력해왔다. (카리스마에서 비롯되는) 예언들이 생생하고 지속적인 것이 되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신중함과 상식에 관한, 현명한 권고들을 그 카리스마를 따르는 이들이 탄력적으로 잘 받아들이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를 타협 없이, 주석을 달지 않고 원래 형태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사람, 그리하여 그 카리스마에 관련된 극단적인 질문들과 역설들을 수호하는 사람이 그 카리스마를 살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카리스마의 DNA를 수호하면서, 장차 누군가 유전자 변형을 겪지 않은 (그 카리스마의) 한 씨앗을 다시 활성화할 수 있게 될 미래의 어느 날, 그 카리스마가 부활할 수 있기 위한 조건들을 창출해낸다. 마르코가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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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Didier Descouens / Wikimedia Commons, 같은 방식으로 저자를 밝히고 공유할 것, 국제 4.0 (이탈리아 비첸짜[Vicenza]의 몬테 디 피에타[Monte di Pietà]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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