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23세 공동체협회의 ‘공동체 생활가정’ 이야기

마우리지오 : 몇 년 전에 저희가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뵈러 갔을 때 한 신부님께서 “여러분은 이 사회 안에 존재하는 생태적인 섬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 안에서 하고 있는 작은 노력들을 긍정적으로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오레스테 벤지 신부님이 ‘공동체 생활가정’을 만든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신부님이 어린이 보호시설을 방문했을 때 청년들이 “왜 우리를 신부님 댁에 데려가지 않습니까”하고 묻곤 했답니다. 그 말이 신부님의 가슴을 파고 들었고, 그래서 아이들을 가정 안에 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가족 안에 창조적인 생명력(generativity)이 있다고 믿습니다. 경제 안에서의 형제애 같은 것이죠. 기업에서 한가족처럼 일할 수 있고 아파트 단지에서도 한가족처럼 살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 생활가정에서 한가족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셜하우징(쉐어하우스) 사례가 있지 않습니까?
저도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가 한가족처럼 살 수 있고 우리 협회도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가족이 좀 더 공정한 사회로 가는 열쇠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족을 통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면서 갈등을 줄이고 서로 돌보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안에서는 특정한 누군가를 돌보는 게 아니라 서로가 함께 돌봅니다.
패치 아담스가 말한 아주 아름다운 문구가 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모두가 어떤 면에서는 의사이고 어떤 면에서는 환자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관계가 우리 존재의 기본구조’라고 말했어요. 가족 안에서 누군가를 돌보면서 조금씩 서로를 돌보게 되는 것입니다. 짧은 몇 가지 사례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런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 우리를 앞으로 나갈 수 있게 이끌어 줄 것입니다.

저는 보통 하루에 네 가족을 만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파키스탄 청년인 사미(Sami)와 아침을 먹어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공동체 생활가정에는 18명이 같이 살고 있습니다. 사미는 파키스탄을 떠나 여러 고비를 넘기고 튀르기예에 도착했습니다. 난민들이 유럽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려고 유럽연합이 튀르키예에 40억 유로(약 5조 5천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불하고 있다는 걸 다들 아실 겁니다. 그런데 사미는 튀르키예에 있을 때 권총 손잡이로 폭행을 당하는 일을 겪었어요. 귀 바로 위쪽에 큰 상처를 입었죠.
사미는 3년 전부터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3주 동안 파키스탄에 있는 자기 가족을 방문하고 돌아왔어요. 어느 날 문신을 하러 다녀오겠다고 해서, 저는 아내와 의논한 뒤 자기 가슴에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나는 이긴다, 그리고 배운다”라고 쓰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타투숍을 다녀온 그를 보니 귀 밑에 ‘AK47(소련제 소총 모델) 그림’을 새긴 것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랐어요. 제가 사미에게 “이제 경찰이 너를 볼 때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겠다”고 타박을 했습니다.
그 그림을 새겨넣은 이유가 “너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에게 네가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냐”고 물었어요. 그 문신의 총구가 상처 부위를 향하고 있었거든요. 두 달 동안 고민을 하다가 그 문신 위에 꽃을 그려넣자고 제안했는데, 다행히 사미가 받아들였어요. 그는 이제 더 이상 테러리스트 같아 보이지 않아요. 사미는 현재 두 군데서 일합니다. 두 군데 다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요. 사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주택단지에 사는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힘든 여행을 거쳐 이태리에 도착한 7개 국적의 청년들과 살고 있어요. 작은 배를 타고 온 이들을 보며 ‘우리의 적이 아니라 우리의 기회다’라고 생각했어요. 사미를 보면 알 수 있죠. 우리 가정에 함께 사는 18명 외에도 교구 공동주택단지에 모두 45명이 살고 있습니다. 몇 사람의 이야기를 더 들려드릴게요.
세르지오(Sergio)는 교통사고 때문에 30년간 휠체어를 타며 혼자 살았습니다. 건강 문제가 여러 가지 겹치면서 팬데믹 기간에 18개월간 병원에서 지내게 됐어요. 팬데믹 기간에 지내는 병원에서의 하루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방에서 나갈 수도 없고 오후 6시면 어김 없이 저녁을 먹고…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물론 집에 돌아갈 수도 없죠.
어떤 사람은 50세가 넘은 세르지오가 공동주택에 함께 거주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공동주택에는 38세에 사고를 당해 요양원에 가게 되었었던 분이 있어요. 자기 집에서는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최소한 자립적인 생활이 보장된다면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사미는 세르지오와 친구가 됐고 그는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어요. 그는 자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됐고, 우리는 더 필요한 부분을 보조해줍니다. 그는 내성적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지내기를 어려워 했는데, 우리와 함께 가정적인 환경에서 살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은 우리 협동조합에서 온라인 판매 업무를 돕고 있습니다.
저는 두 개의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7년 전에 시작한 재활용품을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입니다. 요양 서비스를 받으며 살던 세르지오가 지금은 이 일을 하면서 우리에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병원의 요양서비스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이 재활용품 판매장은 ‘선물에서 시작되는 경제’를 보여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옷, 물건 등을 나눕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채팅방이 있어서 모든 것을 나눕니다. 버리는 것은 거의 없지요.
세 자녀의 엄마였던 알마는 10년 전 침대에서 얼어나지 못할 정도로 우울증을 앓으며 엄마 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한 협회가 그를 우리에게 소개했고 그는 우리 작업장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알마는 다행히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인턴십을 거쳐 단기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정직원이 되었고 재활용 의류 파트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알마는 완전히 회복했어요. 하루는 제게 와서는 “다른 직장에 이직해 더 짧은 시간 일하고 더 높은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여기가 가족 같아서 남기로 했다”고 말했어요. 제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알마는 이제 우리 협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부자르는 유기농 제품을 만드는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조합입니다. 그는 시가 운영하는 임대주택에 사는 취약 가정의 일원이었습니다. 그는 일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일반적인 인턴십 과정을 밟고 있었습니다. 눈 내리는 어느 일요일이었어요. 우리는 가끔 일요일에 출근해 다음 날 나가는 제품을 미리 준비한답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직원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부자르가 휴게실의 커피 머신 앞에 혼자 있다는 거에요. 아내가 그를 집에서 내쫓은 겁니다. 가족들에게서 위협을 받은 그는 협동조합이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생각해서 거기를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살 곳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 직원과 조합원들도 경우에 따라 거주할 곳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부자르는 이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살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본당에서 제공한 공간에는 저희 직원과 사회 복무(비무장 및 비폭력 방어, 교육, 민족간 평화 등 국가를 위해 몇 개월간 봉사하는 제도로 우리나라의 ‘대체 복무’ 제도와 비슷하다) 중인 청년들이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올리베티(Olivetti)는 회사의 최고경영자가 회사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는 직원보다 10배 이상의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협동조합은 최고경영자가 두 배를 받습니다. 사실 두 배, 세 배, 다섯 배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임금은 윤리적이지 않다고 말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동차 기업 피아트(Fiat)의 CEO 마르키오네는 직원 1,400명 분의 임금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이건 병적인 시스템이죠. 이런 식은 안됩니다.
우리 경제학자들은 GDP가 경제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GDP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이 희망을 잃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사미는 일을 찾았고 당당하게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GDP는 장애인이 요양 서비스를 받는 대신 자립하여 사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세르지오가 18개월간 쓴 병원비에 세금이 36만 4,000유로(5억원)가 투입됐습니다. GDP는 우울증 등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일하면서 살아갈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취약한 상황인지 알려주지 못합니다.
노숙자들의 개인적인 상황을 알려주는 지표들은 다른 데 있습니다. 자마니(Stefano Zamagni), 베케티(Leonardo Becchetti), 브루니(luigino Bruni) 교수가 ‘인간 발전 지표’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GDP에는 진정한 지표, 즉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닌 것만 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버려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주었습니다. 저는 이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함께 일하고 있는 청년과 장애인들이 약물 중독에 빠지는 경영인들보다 훨씬 더 정상적인 것 같습니다. 프랑코 바살리아(Franco Basaglia)가 “그 누구도 가까이서 보면 정상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저도 그 말에 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GDP에는 없는 생명 창조력이 제 마음에 특별한 감동을 준 이야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심각한 장애를 지닌 청년인 그라피아가 10년 동안 우리와 지내다가 작년 7월 4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근 몇 년간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됐고 어떤 근육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지만 그는 엄청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무교육과정을 다 마쳤을 때 그는 스스로 장애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애인들과 공부하기 싫다고 했어요. 직업교육센터에 문의한 결과 일주일에 두 번씩 살레시오회의 사빌리아노(Savigliano) 요리 전문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라피아에게나 직업학교 학생들에게도 정말 아름다운 경험이었어요. 그들은 매년 우리를 학교에 초대했어요. 사실 법적으로는 직업학교는 비장애인만 다닐 수 있습니다. 장애인은 주방에서 요리할 수 없게 돼있지만 살레시오회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그라피아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학교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말씀했어요.
또 한 번은 93세의 어르신 마리아가 저에게 전화를 주셨어요. 살던 집을 판 뒤 요양원으로 가지 않고 우리 공동주택에 와서 함께 살고 싶다고 하셨죠. 2000년이었는데 제가 다시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 드렸어요. 결국 저희에게 오셔서 3년간 사시고 97세에 돌아가셨습니다. 95세에 뇌출혈이 와서 걷지 못하게 될 뻔했는데 우리가 물리치료사를 불러 다시 걷게 되셨어요. 요양원에서는 걷지 못하면 휠체어에 앉히고 코줄, 소변줄 등을 삽입하죠. 하지만 마리아는 96세의 연세로 2002년 7월에 태어난 우리 넷째 루카를 돌봐주셨어요. 2002년 여름 내내 우리에게 걱정 말고 편안히 식사하라며 “루카는 내가 돌보겠다”고 하시면서 정원에서 루카 유모차를 밀어주셨어요. 이것이 제가 보는 생명창조력(generativity)의 한 장면입니다. 누구나 뭔가 나눌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장면들은 우리 마음에 오래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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