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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쏘 / 성심당


성심당은 한국전쟁 중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에 동원된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를 타고 피난온 임길순이 대전역에서 천막을 치고 찐빵을 팔면서 시작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유엔사령부가 12월 8일 흥남 철수를 시작하였다. 함주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던 임길순은 아내 한덕순과 네 딸을 동반하여 피난길에 나섰다. 혹독한 추위 속에 생사의 고비를 넘으면서 임길순은 "이번에 살아날 수 있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였다(김태훈, 2016: 37). 기적적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할 수 있었던 임길순과 그의 가족은 거제도를 거쳐 진해에 정착하였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났고 거제도를 거쳐 정착한 진해에서 1954년 8월에는 장남 임영진이 태어났다. 1955년, 진해에서 서울까지 기차가 개통되자 임길순은 서울로 떠나기로 결정하였지만 기차가 대전역에서 고장나 멈추었다. 임길순은 대전역에서 가까운 대흥동 성당을 찾았고, 오기선 신부로부터 밀가루 두 포대를 받았다. 그는 이 밀가루로 찐빵장사를 시작하던 첫 날부터 팔다 남은 빵을 역 주변의 배고픈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의 나눔은 단순히 팔다남은 것을 처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 하루에 만드는 찐빵의 1/3을 이웃과 나눈 것은 그가 피난길에 했던 다짐의 실천이었다. 그는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고, 장례의 전 과정을 함께 하는 가톨릭교회의 연령회장으로 20년간 활동하였다.

1967년 성심당은 은행동 153번지로 이전을 하였고 제과점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길순은 제과점 운영보다 나눔과 봉사에 더 관심이 많았고, 한덕순 역시 복잡한 제빵 기술은 익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장장을 비롯한 제빵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제과점을 운영하였다. 1974년 여름, 임길순의 가족과 한집에 거주하며 일을 하던 공장장과 제빵 기술자 5명이 종적을 감추었다. 제빵 기술이 없는 주인을 상대로 태업을 일삼고 가불을 요구하던 공장장이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술자들을 데리고 떠나버린 것이었다. 장남 임영진은 어려서부터 제과점 일을 도왔지만 가업을 이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한 순간에 기술자들이 사라져 성심당이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하자 온 가족이 투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영진은 그 때부터 열정적으로 제빵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1980년 5월 성심당의 대표적 히트 상품인 튀김소보루, 1983년에는 포장빙수를 출시하였다. 1982년 6월, 김미진과 결혼한 임영진은 신혼여행 중 도쿄에서 생크림케익을 맛본 후 1985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생크림 케이크를 출시하는 등 신제품 개발을 이어갔으며, 미술을 전공한 김미진은 참신한 마케팅으로 매출 상승에 기여하기 시작했다.

1983년 대흥동 성당으로 발령을 받은 유흥식 신부를 통해 임영진 부부는 포콜라레 운동을 알게 된다. 이 운동의 정신이 그들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까지는 10여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1985년에는 은행동 153번지의 뒷 건물을 매입하였고, 1992년에는 현재의 성심당 본점인 은행동 145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프랜차이즈 베이커리가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유럽의 빵문화가 소개되고 제빵업계의 트랜드가 바뀌기 시작했다. 또한 공공기업과 기업들이 빠져나가고 대전 외곽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설되면서 대전의 원도심은 쇠퇴하고 있었다. 성심당 역시 성장세가 둔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외적 요인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위기가 찾아왔다. 임길순에게는 딸 다섯과 영진, 기석 두 아들이 있었으며 장남인 임영진은 1981년 부터 성심당의 2대 경영주였다. 그런데 성심당에서 형과 함께 근무하던 기석이 독자적으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임길순은 153번지의 건물을 기석의 소유로 넘겼고, 기석은 건물을 담보로 자금을 마련한 후, '주식회사 성심당'을 설립하였다. 1996년 대전에는 두 개의 성심당이 있었다. 하나는 개인 사업자인 임영진이 운영하는 은행동 145번지의 성심당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기석의 은행동 153번지의 주식회사 성심당이었다.

은행동 145번지의 성심당 건물 매입을 위한 대출과 153번지의 건물을 기석에게 넘기면서 생긴 손실로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발생하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임영진은 1997년 여름,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잠적했다. 성심당의 직원 80여명은 일제히 사표를 내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임기석의 성심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임영진의 성심당은 한 달 반동안 문을 닫았다. 그 후 다시 각오를 다진 임영진은 17년간 성심당에서 함께 일했던 박병선 과장과 함께 성심당의 영업을 재개했다. 1999년, 김미진이 모야모야병으로 뇌수술을 받았다. 성심당 운영에 닥친 난관과 김미진의 발병은 이들 부부가 삶의 근본적인 의미에 시선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임영진 김미진 부부는 필리핀 타가이타이에서 열린 포콜라레 운동의 사회적 측면인 새인류학교(New Humanity School)에 참석하였고, 이 학교에서 접한 친교경제 EoC의 정신을 기업 경영을 통해 실천하기로 결정한다. 김미진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한다.


"그 때 회사는 어려움이 최고조에 달한 때였어. 시동생이 90년대 중반쯤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해서 우리보다 잘되고, 항의 전화는 다 우리한테 오는거지. 그런데 우리가 '거기하고 우리는 달라요' 그럴 수는 없잖아? 은행 부채도 그 때 생긴거고... 우리도 어렵고 부채도 있는데 시부모님은 "그래도 너희는 집이 있지 않냐..." 그러시고... 페데스(임영진)는 "알겠습니다" 하고 순종했어. 성심당은 좋은 일 많이 한다고 알려져 있지. 그래서 온갖 요구가 많았어. 대부분 '도와 달라' '어려운 사람 방문하는데 빵 좀 후원해 달라' 이런 사람들이야... 그런데 EoC를 통해 자발적 가난에 대해 알게 된거지."


김미진은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임영진에게 제안한다.


"우리가 힘들어도 직원 월급은 어떻게든 주잖아? '누가 도와달라고 해서 후원금으로 나가는 거 말고 EoC 정신으로 다만 돈 백만원이라도 떼어 놓는 것이 좋겠다. 이걸 바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냥 좋은 기억으로만 남고 말 것 같다'고 했지. 그러자 '좋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오자마자 즉시 했어."


귀국 후 김미진은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에게 편지를 썼다. 끼아라 루빅은 회사를 위하여 "모든 이에게 좋은 일을 하십시오"라는 성서의 구절을 주며 격려하였고, 이 구절은 그대로 성심당의 사훈이 되었다. 2001년 9월, 성심당은 주식회사 로쏘(rosso)로 법인 전환을 하면서 회사 정관에 성심당이 EoC 기업임을 명시하였다.

임기석의 성심당(주)는 대전 동구 하소동에 프랜차이즈 공장을 차렸고 24개의 가맹점을 확보하였지만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금 압박에 빠졌다. 임길순은 임영진에게 다시 은행동 153번지를 인수할 것을 제안했다. 임영진은 막대한 부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다시 대출을 받아 153번지의 건물을 인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임기석은 계속하여 사업규모를 키워 나갔다. 2001년 4월에는 미국의 L.A.의 한인타운에 직영점을 열었다. 그러나 2000년 58억원을 기록했던 매출은 2001년 46억원, 2002년에는 37억원으로 하락했고, 그 해 말에는 군납을 하는 수원공장을 폐쇄하였다. 2003년에는 국세 체납으로 군납을 할 수 없게 되었고, 3월 24일 최종 부도처리 되었다.


"나는... 페데스가 아파하는 동생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침묵했어. '자기 동생은 왜 그러는데?' 이런 말 한마디를 내가 안 했던 것 같아요. 거의 십년을... 그렇지만 둘 다 그걸로 인해서 너무나 아팠지. (시동생이) 저쪽에서 걸어오면... 두렵고 무섭고 막 가슴이 떨리고 말도 못하고 이랬었거든. 지금의 나를 보는 사람들은 거짓말한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시간 안에 EoC도 같이 돌아가고 같이 들어 있었고..."


임영진의 성심당 역시 자금 압박에 시달렸다. 50억에 달하는 은행대출은 연간 이자만 3억 6천만원에 달했는데 매출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직원들의 급여지급과 세금납부할 돈이 부족해 다시 대출을 받아야 했다.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은행동 153번지의 건물을 매각하고자 하였으나 쇠락하고 있는 원도심의 건물을 매수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EoC 무지개 프로젝트 이런 거는 어떤 시스템이나 매뉴얼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를... 시기가 됐을 때 해야 되는 거지. 우리가 직원들을 위해 많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사분규도 있고 계속 이런 일이 있었잖아. (한숨) 매장에 계속 손님은 많아. 남들이 볼 때는 똑같아. 그런데 은행이자 내고... 직원 월급은 그래도 올라가잖아? 페데스는 직원이 빚진 게 아니라는거지. 우리가 빚을 졌기 때문에 은행 빚을 갚을 때까지 월급 동결을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거지. 월급은 계속 올라가지, 거래처 줘야지, 고정비 나가지. 남들이 볼 때 성심당은 항상 잘 되니까 계속 뭐 나가야 되는 그런 비용들이 있지... 그래서 한동안 우리가 EoC 기금을 못 냈어요. 근데 그게 굉장히 우리한테는 매력적이었어요. EoC의 매력이... 이게 진짜 다달이 내는 회비가 아니라는 것이..."


그런 상황에서 2005년 1월 22일 성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옆 건물에서 시작된 불이 옮겨와 매장만이 아니라 빵을 만드는 공장까지 전소되었다.


"화재가 나던 날 페데스와 쏠레(딸)는 의왕 마리아폴리 센터에 피정에 참석 중이었고, 꼴베(아들)는 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 내가 미사 끝나고 성당에서 나왔을 때 불이 났잖아? 불이 나면 내가 막 '아이고 이거 어떡하냐'고 주저앉아 울고 짜고 이래야 되는데 안그런거야. 그냥 성당 안으로 다시 뛰어가 성체 앞에서 '당신만이 나의 보물입니다'라고 얘기를 했어... 그리고 '아, 50주년을 못 넘기고 49년 만에 우리가 문을 닫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그 순간에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동안에 여기서 놀이터처럼 너무나 즐겁게 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페데스한테 바로 전화도 안했지. 오다가 교통사고 나서 진짜 설상가상 더 어려운 일이 생길까봐... 그런데 페데스도 피정 끝나고 소감 발표할 때 앞에 나가서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잘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누가 집에 불났다는 소식을 전해주더래. 오는데 보니까 막 허겁지겁 오는 게 아니라 걸어오고 있어. 그 때 '아 우리가 시대사조를 거슬러 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지만 화재 다음날 현장에 모인 직원들은 "잿더미 속의 우리 회사 우리가 일으켜 세우자"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청소를 시작하고 일부는 중고 제빵기계를 구하러 다녔다.


"화재 다음 날 현장에 가보니까 바닥이 물에 젖어 축축하고 컴컴하고 을씨년스럽게... 이러잖아. 그런데 직원들이, 정말 자기네들이... 현수막 문구도 자기네가 쓴 거지 '회사 우리가 살리자' 막 이런 현수막을 벽에다 붙여놓고 중고기계 알아보러 다니고 자기들이 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안에서 진짜 한 가족 정신이 생긴 거예요. 그 때까지 직원이,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걸 몰랐어요. 한가족신문이나 한가족프로젝트라는 우리 회사의 '한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때 들어갔어요. 직원의 입에서 그게 나와서 그렇게 하게 된 거..."


"그렇게 다시 오픈을 했을 때... 페데스도 그때는 쉐프복 입고 모자 쓰고... 직접 가위들고 시식용 빵 자르고... 나도 목이 쉴 정도로 매일 가서 반갑습니다. 성심당입니다... 정말 손님이 오는데 너무 반갑고... 그런 마음이 절절하게 드니까 나도 모르게 막...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직원들이 선창하면 후창하고... 매장이 쩌렁쩌렁 울리게... 막 에너지가 넘치는 거예요."


"업계에서는 성심당... 이번에는 좀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동네 빵집 윈도우베이커리로서는 상징적인데 이번에 못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그때가 프랜차이즈의 완전 르네상스 시대여서 하던 빵집들도 다 프랜차이즈로 바꾸고 막 이럴 때였거든요. 그런데 다시 오픈을 하고 매출이 30%가 올랐어요. 그게 쉽지 않거든... 30%... 왜냐하면 일단 신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고 소비층이 별로 없는 동네에서 30퍼센트가 올라갔으니까... 그러니까 직원들 자신감이 완전히 하늘을 찌를듯이 충천하고 나도 더 확신이 생긴거지."


성심당이 위치한 주변의 환경도 변하기 시작했다. 2006년 3월에 개통된 지하철은 중앙로와 대전역 등 원도심 지역으로 연결되었고, 2007년 중앙로의 주요 교차로에 횡단보도가 설치되면서 유동인구가 늘었다. 또한 대전광역시의 원도심 활성화사업 추진도 성심당의 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011년 가을, 성심당 본점에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전 롯데백화점에서 성심당에 입점을 제안했다. 매장의 위치는 프랑스의 델리 베이커리 '포숑'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 대기업의 자녀들이 외국의 유명 베이커리를 수입하여 고품격 카페형 베이커리 매장을 열었는데 불황으로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자 골목 상권까지 파고드는 재벌을 향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롯데백화점의 제안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성심당은 고심 끝에 백화점 입점을 결정하였지만 우려와 달리 높은 성과를 달성하였다. 포숑의 하루 매출이 30만원에서 50만원 사이였는데 성심당의 첫날 매출은 800만원이었고, 그 후로도 평일 700만원, 1,200만원의 매출을 꾸준히 유지했다.

대전 롯데백화점 입점의 성과로 언론의 조명이 시작되었고, 성심당 본점의 매출 또한 동반상승하면서 성심당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롯데 백화점 소공동 본점에서 성심당 팝업 스토어를 열자는 제안이 들어 왔다. 2013년 1월 14일 "No. 1 베이커리 성심당 초대전"이라는 타이틀로 일주일 간 열린 팝업 스토어에는 17,000여 명의 고객이 다녀 갔고, 1억 5천만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성심당과 롯데백화점은 두 번 더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2013년 10월, 9일간 부산 롯데백화점에서 열린 행사에는 3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고, 2014년 10월, 열흘 동안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열린 세번째 팝업 스토어에서는 4억 3,200만원의 매출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성심당의 결정적 도약은 2012년 11월의 대전역 입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전 롯데백화점 입점과 소공동 본점의 행사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성심당은 대전역 입점을 계기로 임계점을 넘어섰다. 성심당 대전역점의 하루 고객은 2, 3천명이 넘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성심당은 2014년 12월부터 경부선과 호남선의 역사에서 성심당의 제품을 직접 수령을 하거나 퀵 연계를 할 수 있는 'KTX 특송'을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누적되었던 부채를 완전히 청산한 것도 대적역점의 매출 상승에 힘입은 것이었다.


"대전역이 정말 엄청났잖아. 아버님이 천막치고 장사하던 그 곳에서 우리가 그렇게 성공을 하니까... 우리 아버님이 '하느님은 그냥 되갚는 게 아니라 복리고 계산해 주신다'고 항상 말씀하셨는데... 대전역점이 상상 외로 잘 되면서 은행부채도 갚게 되고... 꼴베(아들)를 생각하면... 유산으로 빚을 물려줘야 하니 이 어려운 세상을 어떻게 이겨나갈까... 이런 짠한 게 있었거든. 대출금 다 갚고 나서 우리 식구 와인 파티 한번 했잖아. 그렇지만 빚을 다 갚았다고 행복해 죽겠고 이런 것도 없는 거야. '이제부터 모아야 되겠다'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가뿐하다. 세끼 먹고 살면 되는 거고...' 하늘의 금고라는 말이 바로 이거구나 하느님이 필요한 시기에 금고문을 딱 열어주는..."


2011년 롯제백화점 입점, 2012년 대전역 입점, 2017년 대전 유성구 DCC점, 2020년 롯데 백화점 확장 이전으로 이어지는 성심당의 거침없는 성장에 대해 임영진은


"제가 제 능력을 알고 있잖아요? 진행과정에 어떤 어려운 일 또 새로운 일이 생기는데 진짜 내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선물이 오는 듯한... 내 능력이 아닌데... 섭리예요. 2012년 갑자기 대전역에 입점하게 되는 거... 그렇죠. 선물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어 지금 그 EoC를 내가 느끼는 거예요. 도저히 이게 인위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인데..."


"재수가 있어도 한두 번 있다가 말지... 단지 내가 하는 거는 일 속에서,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그냥 방법은 좀 화날 때 화 안내고, 손해 볼 때 좀 주고... 그거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구나 하는 걸 믿게 된거죠. 뭐 복잡한 것도 없어요. 사랑하는 게 극기가 아니더라고요. 영향을 미쳐서 좋은 이미지가 퍼지는 건데... 그건 모르지... 쭉쭉 풀리는 것들이... 너무너무 단순한 거고,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이렇게 왔느냐 뭐... 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 벽을 못 넘는 거예요. 현실적으로는 뺏기는 걸로 보이고, 먼저 줘야 되니까... 어, 근데 넘기만 하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걸 하는 거예요."


성심당은 2017년 유성구 DCC점을 열었고, 2020년, 대전 롯데백화점 지하에 있던 성심당은 1층으로 확장 이전하였다. 2021년 현재, 성심당은 은행동 본점, 대전 롯데백화점점, 대전역점, DCC점이 있고, 케이크와 디저트 전문점인 케익 부띠끄, 전통과자점 '옛맛솜씨', 브런치와 식사를 제공하는 '플라잉팬', 경양식점 '테라스 키친', 파스타 전문점인 '삐아토', 일본식 우동전문점 '우동야', 케이터링을 하는 '오븐 스토리'가 있다.

2007년 1월, 성심당은 무지개 프로젝트를 경영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포상금은 분기별 결산 후 이윤의 15%를 직원들에게 주고 있는데 이는 구성원의 노동과 협력이 이룬 결실을 함께 나누는 것일 뿐 기업의 목표달성을 위한 동기부여의 차원에서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아니다. 포상금으로 지급한 금액의 20%는 EoC 기금으로 책정한다. 또한 지역사회의 젊은이들을 위한 장학금과 불우이웃돕기, 천재지변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돕기 등을 위해 매년 당기순이익의 5~7%를 기부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창업주가 시작한 빵 나누기는 현재에도 취약계층 보호센터, 사회복지 시설, 보육원과 자선단체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성심당은 기업 문화의 유산을 다지고 전승하기 위하여 문화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2022년 1월 20일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 문화원은 생태친화적 삶을 지향하며 친교경제 EoC의 정신을 확산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의 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출처: 성공회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이탈리아 시민경제 사상과 한국 친교경제 EoC 기업 사례 연구> 사회학과 강영선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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