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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문화culture of giving

모두를 위한 경제, EoC의 생산 활동의 주체들 - 기업가와 노동자, 그리고 기업의 기타 직원들 – 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원칙들은 오늘날 경제 관행과 경제 이론 면에서 지배적인 문화와는 다른, 하나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문화는 한마디로 "소유 문화(culture of having)"와는 정반대되는 “주는 문화(culture of giving)”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준다는 것은 “'존재”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표현이다. 다른 말로는 개인주의도 집단주의도 아닌, “나눔과 친교communion”라는 인간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주는 문화는 개인주의적인 덕德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종의 자선사업philanthropy이나 복지혜택welfare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본질 그 자체가 “나눔과 친교communion”인 존재이다. 따라서 주는 것 모두와 주는 행위 모두가 《주는 문화culture of giving》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준다”고 하지만, 어떤 “주는 행위”는 개인과 국민을 지배하려 하거나 심지어 억압하려 하는 욕구, 곧 다른 이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욕구로 오염된 경우도 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만 “주는” 것이다.

한편 “주는 행위” 그 자체로써 만족감과 자기만족을 추구하면서 “주는 행위”가 있다. 이것은 깊이 들어가보면 결국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표현으로,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개 자존심을 상하게 되고,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해타산을 따지며 실리주의적으로 “주는 행위”도 있다. 이런 류의 “주는 행위”는 최근 신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경향에도 존재하는데, 신자유주의는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이라고 말하는 “주는 행위”가 있다.


이 “주는 행위”는 상대방의 존엄성을 존중하면서 그에게 나 자신을 열어 보이는 것으로서,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복음의 경험을 회사 경영 면에서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줌으로써 받게 된다는 사실은, 때때로 예기치 않은 수익을 얻게 되거나 기발한 혁신 기술 솔루션의 개발하게 되는 경우, 또는 성공적인 신제품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될 때도, 실제로 체험하게 된다.


문화적 영감


1943년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포콜라레운동이 시작된 이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새 계명을 복음 정신 안에서 새롭게 깨닫게 됨에 따라, “영적인 재화와 물질적인 재화의 나눔(communion)”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재화의 나눔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범을 따라 포콜라레운동에서 실제적인 관행이 되었다.

이 사실은 크나큰 중요성을 지닌다. 그 결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의 나눔과 재화의 나눔은 본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보물이었고,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나눔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지만, 수도원들과 몇몇 평신도 공동체들에서는 이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트렌토에서 태어나고 있던 그 작은 공동체에서 이 같은 나눔이 다시 폭발적으로 확산됨으로써, 많은 무리의 사람들, 곧 “대중”에게, 또 한 백성을 이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다시 번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그 후 무르익게 될, 그 모든 결실들과 결과들도 가져오게 된다.

끼아라와 그 첫 동료들은 그 당시부터 이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끼아라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재화의 나눔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트렌토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두세 곳이 있다… 그곳에 가자. 우리가 가진 것을 거기에 가지고 가서, 그들과 함께 나누자…' 이는 아주 단순한 논리였습니다. 곧, 우리는 더 많이 가지고 있고, 그들은 덜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어느 정도 평등해지도록 그들의 삶의 수준을 높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복음 구절에 대한 “놀라운” 경험이 시작된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였는데도, 식료품, 옷, 의약품이 놀랄 만큼 풍족하게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복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바로 그것에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문제에 대한 “간단명료한” 답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는 복음 구절에 대한 "놀라운" 경험이 시작된다. "전쟁이 한창이었던 시기였는데도, 식료품, 옷, 의약품이 놀랄 만큼 풍족하게 들어옵니다". 이로써, 복음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바로 그것에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문제에 대한 "간단명료한" 답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다.



논리


오늘날의 경제는 전환점에 직면해 있다. 세계화 과정은 풍요와 번영에서 제외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세계화 과정으로 인해 인간관계의 유일한 형태는 경제 관계뿐이고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버림으로써,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슈퍼마켓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EoC는 이러한 도전들을 극복하기 위해 성령께서 일깨워 주고 있는 해답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카리스마*들은 시대적으로 큰 변화가 있을 때면 직면하게 되는 도전들에 답이 되어 주었다. 예를 들어 ‘베네딕도회’의 대수도원이나 중세 ‘프란치스코회’의 『몬티 디 피에타Monti di pietà』*를 떠올리게 된다.

* ‘카리스마’는 여기서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선익善益과 공동체 형성을 위한 “성령의 은사恩賜”를 의미한다. 대중을 설득시켜 자신을 따르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카리스마’와는 구분된다.


* 『몬티 디 피에타Monti di pietà』는 ‘서민을 위한 펀드’라고 할 수 있는 이 사업은 15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실시한 소액 대부업貸付業이다. 서민들이 담보로 물건을 맡기면 매우 저렴한 이자로 급전을 빌려 주곤 했다. * 옮긴이 주


그리고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주제인, “시장에 찬성하는가, 혹은 반대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EoC는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과 대화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삶을 우선 순위에 둔, 자신의 노선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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