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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이 복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

Luigino Bruni

Luigino Bruni

교황 레오 14세의 교황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무엇보다 특히 나쁜 빈곤, 곧 궁핍함과 박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복음의 아름다운 가난, 곧 청빈淸貧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적인 인본주의에서 ‘가난’이라는 단어의 스펙트럼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곧, 가난을 다른 이들로 인해, 혹은 불행한 여건들 때문에 겪게 되는 사람들의 절망에서부터, 가난을 진복眞福, 즉 참된 행복의 길로서 선택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종종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한, 왕도王道이자 첩경捷徑이 되곤 합니다. 교회 안에는, “복되다.”고 불리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스스로 가난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늘 있어왔고, 현재에도 있습니다(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제21항). 그리고 그들은, 가난에 대해서라면 단지 그 어두운 측면만을 알고 있는 그 가난한 사람들의 길동무가 되어줄 때에만, 비로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첫 번째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러한 선택된 가난이, 하느님의 나라의 이러한 담보가, (빈곤 퇴치라는) ‘이번 천년기(삼천년기)의 목표’가 달성됨에 따라, 지상地上에서 배제된다면, 바로 그날이야말로 인류에게 한 가지 최악의 소식을 전하는 날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만약 복음적인 가난이 없다면, 인류는 엄청나게 훨씬 더 가난해지고 훨씬 더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인류가 그것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레오 14세 교황의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무엇보다 특히 나쁜 가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우리는 이를 ‘궁핍 내지 박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레오 14세는 우리가 이러한 나쁜 가난의 상황을 치유하고 돌볼 것을 독려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제12항). 그러면서도 복음의 아름다운 가난, 청빈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잊지 않는데, 특히 가난에 대한 성경적 관점에 할애된 기나긴 부분들을 통해 그렇게 언급합니다. 우리는 가난함에 대한 복음적인 시각과 판단을, 부유함에 대한 판단과 분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 또 삶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제11항). 실제로 가난은 개인적인 지위나 인물의 한 특성이 아니며, ‘씁쓸한 운명’도 아닙니다(제14항). 오히려 가난은 사람들과의 잘못된 관계이자, 기관들 및 재화들과의 잘못된 관계입니다. 곧 가난은 ‘관계악’이며, 구체적인 사람들과 기관들의 ‘집합적이고도 개인적인 선택들’의 결과물입니다.                                                                                                                                                                                        

 궁핍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지나치게 부유하거나 종종 불의한 방식으로 부유한 다른 사람들과 기관들에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언제나 그런 선택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로써, “너의 부유함이 나의 빈곤의 이유”라고 말하는 데에까지 이르는 것이 아니라, – 이는 많은 사회적 질투들의 기저에 있는 명제입니다. -  오히려 사람들의 빈곤과 부유함에는 본질적으로 인간관계를 반영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단지 인식하는 것입니다(제64항). 또한 사람들의 빈곤과 부유함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정치적 특성이 있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며(제12항), 남녀 어린이들의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을 단지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가난의 이 두 가지 차원 – 곧, 좋은 가난과 나쁜 가난 – 사이의 생생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이 둘 중에 하나를 배제한다면, 단지 한 가지 오류만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복음적인) 참된 행복들의 역설적인 논리를 철저히 들여다본다면,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셨던 그 가난한 이들 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가난한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단지 겪었을 뿐인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과 같은 가난한 이들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양쪽 모두를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은 어린이들의 참행복이자, 죽어가는 임종자들의 참행복이기도 합니다.

 

 교황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것이자, 구약 및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본, 가난에 대한 하나의 묵상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와 교부들, 그리고 교회 전통의 관점에서 본, 가난에 대한 하나의 묵상이기도 합니다. 이 묵상에서는 가난과 가난한 이들을 중심에 두었던 교회의 카리스마(특별한 은혜)들에 대해,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에 대해(제64항), 그리고 그의 많은 남녀 벗들에 대해 특히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 교황권고는 예수님의 특정한 가난에 대한 고찰이기도 합니다(제20항-22항).

 

 레오 14세 교황의 이 첫 번째 교황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가 라틴어 제목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회칙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와 쌍을 이루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난에 대한 가르침(제3항)과 완전히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난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 재임 기간 동안 핵심적인 주제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지점으로서, (루카 복음 16장에 나오는) 미식가 부자의 식탁 밑에 있는 (가난한) 라자로가 있는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러 사람들과 여러 사물들을 보았는데, – 이러한 것들 중에는 감옥들도 있었습니다(제62항). – 이는 (루카 복음의) 그 미식가 부자 곁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보는 것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교황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를 통해 레오 교황은 자신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역사의 많은 라자로들과 함께 교회와 세상을 계속 바라보고자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레오 교황은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가난한 이들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씁쓸한 운명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제14항)

레오 교황은 다음과 같이 계속 적어 내려갑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감히 단언하는 누군가가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누군가는 자신이 눈이 멀었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레오 교황이 여기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연속선상에서, 이렇게 ‘눈이 멀고 잔인한 모습’을 ‘실적주의 내지 능력주의(meritocracy)의 그릇된 비전’에 다시 연결시킨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삶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는”(제14항)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실적주의, 능력주의는 그릇된 비전입니다. 실제로 실적주의, 능력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주요 구조악들 중의 하나입니다(제90항). 이 구조악은 배척을 낳고, 그러한 배척을 윤리적으로 합법화하려고 합니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적어봅니다. 오늘날에는 선택하지 않은 가난에 대한 세상 일반인들의 위대한 가르침이 존재합니다. A. 센(Sen), M. 유누스(Yunus), 에스터 두플로(Ester Duflo)과 같이 노벨상을 수상한 세 명의 가르침이 그것이고, 가난에 대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다른 많은 학자들의 가르침도 그것입니다. 이들은 가난이란 자유의 박탈이자, 능력(capabilities)의 박탈이며, 따라서 (사회적, 보건적, 가정적, 교육적…) 자본의 결여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삶을 전개해 나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A. 센(Sen)]

 자본의 결여는 흐름들(소득)의 결여로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오직 자본들을 잘 돌봄으로써만, 미래에 흐름들(소득)이 개선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선을 베푸는 것들’도 바로 이 자본들 쪽으로 하도록 그 방향을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제115항 등). 이는 교회의 많은 카리스마(특별한 은혜)들이 수세기 동안 해온 일들이기도 합니다(제76항 등). 이 카리스마들은 학교나 병원을 지으면서 ‘(교육적, 보건적) 자본의 측면에서’ 궁핍에 맞서 싸워왔던 것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향후 문서들에는 가난에 대한 세상 일반인들의 이러한 가르침도 포함되기를 축원해 보도록 합시다. 세상 일반인들의 이러한 가르침이, 가난에 대해 이해하고 가난을 돌보는 데 이미 필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일반인들도 (복음에서 말하는)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가난의 아름다움에 대해 발견하게 되기를 축원해 보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세상에게는, 세상의 가장 훌륭한 부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가난이란 단지 근절해야 할 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너무 적은 의미일 것입니다.


 

사진 저작권: © 디에고 사라 (Diego Sarà)

태그: 루이지노 브루니(Luigino Bruni), 교황 레오 14세, 교황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    이태리어로 작성된 기사의 원본은 아래 웹사이트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edc-online.org/it/italiano/blog/luigino-bruni/it-editoriali-vari/it-varie-editoriali-avvenire/20363-beati-i-poveri-non-la-miseria.html

 

※    이 기사의 영어 번역본 웹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edc-online.org/en/publications/articles-by/luigino-bruni-s-articles/avvenire-editorial/20366-beati-i-poveri-non-la-miseria-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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