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6월 12일
EoC는 경제, 경영 모델이 아닌 ‘삶의 방식’이자 ‘소명’
지난해 말 한국 EoC 사무국에서 올해 5월 남미에서 개최되는 EoC35주년 행사 취재 요청을 받고 선뜻 동행 취재해보겠다고 답을 했다. EoC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 만, 막연한 환상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모두를 위한 경제(EoC, Economy of Communion)’라는 경제, 경영 모델로 35년이나 운영해 온 경험이 쌓였으니 뭔가 새로운 대안모델로 잘 짜인 경영 매뉴얼이나, 시스템이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그래서 35주년 행사 취재를 위해 아르헨티나로 향할 때, 내 머릿속에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정교한 ‘경제 모델’이나 EoC 기업으로 인증받기 위한 구체적인 안내서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쓰레기 매립지 마을 ‘볼카데로’와 파라과이의 원주민 공동체 그리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380여 명의 혁신가들이 뿜어내는 열기 속에서 확인한 사실은 전혀 달랐다. 이번 행사에서 EoC 국제위원회 공동대표 아눅 그레뱅(Anouk Grevin)은 이를 명확히 짚어냈다.
"우리는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친교와 나눔의 경제, EoC』는 하나의 기업 경영 모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중략) 어느 날 우리는 스스로를 ‘EoC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우리가 왜 이 땅에 존재하는지 그 의미와 맞닿아 있는 '소명(Vocación)'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26년 5월 3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EoC 35주년 대회, 아눅 그레뱅 발언 중)

EoC는 완벽히 갖추어진 상태의 경제 모델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타인을 동등한 주체로 대하는 태도, 상처 입을 위험을 무릎쓰고 이웃의 곁에 머물고자하는 ‘삶의 방식(Lifestyle)’ 그 자체였다. 이처럼 제도로서의 모델이 아니라 일상에 스며드는 삶의 양식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가 마주하고 있는 ‘시노드 이행 단계’의 비전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비전, ‘형제애’와 ‘시노달리타스’의 교차점
지난해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종이 이끄는 오늘날 교회의 두 가지 큰 축은 ‘시노달리타스(함께 걷는 여정)’와 ‘보편적 형제애’다. 교종은 회칙 『모든 형제들(Fratelli Tutti)』을 통해 이기심과 배제의 경제를 넘어 상호 돌봄에 기초한 연대의 경제를 촉구했다. 동시에 세계주교시노드를 통해 교회가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특권적 집단이 아니라, 세상의 변방으로 나아가 모든 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두 가지 비전이 세속의 시장 한가운데서 만나는 접점이 바로 EoC라 할 수 있다. 교종이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성직주의를 경계하며 시노드적 교회를 주창하듯, EoC는 이윤 독점과 무한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독단에 맞서 경제 활동을 형제애의 실천으로 변화시키고자 한다. 즉, EoC는 단순한 대안 경제 운동을 넘어, 프란치스코 교종이 꿈꾸는 ‘시노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육화(肉化)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회적 표현’인 것이다.
구조 개혁을 넘어서는 사목원리, ‘관계의 회심’
최근 시노드 최종 문서 반포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2028년까지 이어지는 구체적인 '이행'의 시기로 진입했다. 그러나 제도를 정비하고 회의 구조를 바꾼다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시노달리타스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노달리타스는 개인과 공동체의 영적 깊이가 동반되지 않으면 단순한 조직 운용 기술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주교와 사제들을 비롯해 직무 권한을 가진 이들이 독단적 태도를 버리고 하느님 백성 가까이에서 경청하는 ‘자기 비움(Kenosis)’을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모습은 EoC의 본질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아르헨티나의 건축 자재 기업 디마코(DIMACO)의 헤르만 사장은 기업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가장 비참한 빈민촌인 볼카데로를 찾아 사태의 본질을 성찰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일방적으로 시혜하는 우월적 태도를 버리고, 주민들 스스로 화장실을 지을 수 있도록 자율성을 존중하는 자기 비움을 실천했다. 시노달리타스와 EoC 모두, 우위에 있는 이들이 권위주의를 허물고 이웃을 동등한 형제로 환대하는 ‘관계의 회심’에서 출발함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