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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 우정과 환대로 빚어내는 새로운 경제

경동현 기자

2026년 5월 18일

기획연재: '모두를 위한 경제 EoC' 35주년 ①

탐욕과 이기심 너머, 시장의 '인간적 얼굴'을 복원하다


우리는 흔히 시장을 경쟁과 효율, 그리고 이기심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냉정한 공간으로 여긴다. 하지만 시민경제학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모두를 위한 경제(EoC, Economy of Communion)"(이하 'EoC'로 표기) 핵심 연구자 루이지노 브루니 교수는 지난달 출간된 신간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북돋움coop)를 통해 이러한 통념을 근본부터 뒤집는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주류 경제학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내세우며 시장에서 '관계'와 '감정'을 제거해 버렸다. 이는 인간 상호간에 접촉이나 관계가 없다면 상처 또한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발전 속에 이 꿈은 점차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 결과 익명의 거래를 통해 물질적 풍요는 얻었을지언정,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서로 고립되고 공동체적 유대는 파편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현실은 인간이 고립이나 기계와의 관계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꽃핀다고 믿는 이들에게 더욱 긴급한 과제를 안겨 준다. 기업과 시장의 영역에서도 온전한 인간적 만남이 가져다주는 상처와 축복을 성찰하고 이를 촉구하는 일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시장의 출발은 본래 차가운 계약이나 계산이 아니라,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호 증여(선물 주고받기)'였다. 18세기 나폴리 시민경제 전통의 학자 안토니오 제노베시가 강조했듯, 시장은 낯선 이와의 교환 속에서도 상호부조와 공적 신뢰가 생산되는 따뜻한 공간이어야 한다. 브루니 교수는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에서 극단적인 이익 추구에 빠진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익을 넘어선 동료 사이의 우정인 '필리아(Philia)'와 대가 없이 내어주는 사랑인 '아가페(Agape)'를 경제의 중심에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 필리아에서 아가페까지 시장의 인문학". ⓒ북돋움coop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 필리아에서 아가페까지 시장의 인문학". ⓒ북돋움coop


철학이 현실로, '성심당'과 가톨릭 신앙인의 경영


이 책이 제시하는 '관계 중심의 경제'가 단지 이상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EoC 기업인 대전 '성심당'은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를 현실에서 증명해 왔다.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와 김미진 이사는 필리핀에서 열린 포콜라레 새인류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EoC 철학을 기업 경영에 도입했다. 이번에 출간된 신간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브루니 교수는 성심당이 그가 직접 방문해 경영진들과 교류한 곳이라고 소개하면서 "첫 밀가루 두 포대와 앞으로 만들 빵의 결실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겠다는 70년 전 처음 한 약속은 참으로 풍성한 결과를 얻었다"며 특별한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실제로 성심당은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라는 로마서 구절을 사훈으로 삼고, '무지개 프로젝트'로 소외계층에 빵을 나누며, 주변 노점상이 장사에 쓸 물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골목 상권과 공생하는 훈훈한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성심당 창업 70주년 기념 전시 '오래된 진심' 홍보 포스터. ⓒ성심당
성심당 창업 70주년 기념 전시 '오래된 진심' 홍보 포스터. ⓒ성심당

연대의 불꽃이 시작된 곳, 남미에서 열리는 35주년 국제행사


각자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사는 영성운동인 포콜라레 운동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복음적 생활로서 사회의 혁신을 위해 일하는 '새 인류 운동', '새 가정 운동', '젊은이 운동(젠 운동)', '새 본당 운동' 등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EoC' 운동은 포콜라레 운동에서 '새 인류 운동'과 연결된다. 경제적 이윤으로 보편적 형제애를 실천하는 EoC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재산을 공유하여 필요한 만큼 나누어 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사도 4,34-35), 경제활동으로 얻는 이익을 개인이 소유하지 말고 세상과 함께 나눔으로써 굶주림이나 가난, 사회 불평등의 문화 구조를 바꿔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이 운동의 창설자 키아라 루빅은 어떤 형태의 기업이든 사업을 통해 생겨나는 수익을 셋으로 나누어, 3분의 1은 기업에 재투자하고, 3분의 1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나머지 3분의 1은 '나눔 문화'를 위해 일할 사람들을 양성하는 기관에 할당하자고 제안했다. "모두를 위한 경제 EoC" 모델은 기업의 고용주와 피고용자들 사이의 일치를 추구하면서 나눔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숫자 너머의 사람을 바라보는 이 따뜻한 경제 모델이 올해로 35주년을 맞았다. 'EoC'는 1991년 포콜라레 운동의 창설자 키아라 루빅이 브라질 상파울루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목격한 뒤 제안하면서 싹을 틔웠다. 이를 기념하여 발원지인 남미 대륙, 아르헨티나의 파라나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오는 2026년 5월 24일부터 30일까지 대규모 국제행사가 열린다.


3월 14일 서교동 포콜라레 사무실에서,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는 EoC 35주년 국제행사(5.24-30)를 앞두고 한국 참가 예정자들이 모여 사전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 = 한국EoC.)
3월 14일 서교동 포콜라레 사무실에서,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되는 EoC 35주년 국제행사(5.24-30)를 앞두고 한국 참가 예정자들이 모여 사전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진 제공 = 한국EoC.)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이번 아르헨티나 행사에 동행 취재하여 전 세계에서 모인 연대의 현장을 생생히 전달할 것이다. 5월 26일에는 파라나 산 마르틴 지역의 극빈층 거주지에 있는 '엘 볼카데로(El Volcadero)' 프로젝트를 방문해 가난 속에서 피어나는 상호 돌봄을 확인하고, 27일에는 DIMACO와 DIPORA 등 현지 EoC 기업을 탐방한다. 이어 29일과 30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우시나 델 아르테(Usina del Arte)'에서 열리는 메인 행사에서 세계 각국의 실천가들과 교류할 계획이다. 한국에서도 스페인어-한국어 통역 가이드가 전면 지원될 만큼 많은 가톨릭 기업인과 시민들이 이번 여정에 동참하고 있다. 승자독식과 탐욕의 얼굴을 한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지배적인 오늘날, '인간적 얼굴'을 회복하기 위해 "모두를 위한 경제 EoC" 35년의 묵직한 발걸음. 그 뜨거운 남미의 현장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35주년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는 모두를 위한 경제(EoC) 홈페이지 첫 화면. (https://www.edc-online.org/en/)
35주년 행사 소식을 전하고 있는 모두를 위한 경제(EoC) 홈페이지 첫 화면. (https://www.edc-online.org/en/)


(다음 편에 계속)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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