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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를 원한다면, 상처 안으로 들어가야

경동현 기자

2026년 6월 9일

‘모두를 위한 경제EoC’ 35주년, 남미 현장을 가다 ③ 소명으로 빚어내는 친교와 연대의 경제학

전 세계 EoC 활동가들이 모인 35주년 행사


가난한 이들의 척박한 삶을 마주하며 연대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했던 남미 현장 체험 일정을 뒤로하고, 지난 5월 29일부터 30일까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모두를 위한 경제(EoC)' 35주년 기념 국제 행사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렸다. 앞서 다룬 파라나의 '볼카데로(Volcadero)' 매립지나 파라과이의 '야리 미리(Yarí Mirí)' 원주민 공동체 등 빈곤과 자립의 최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상생의 경제학을 목도했던 전 세계 380여 명의 기업가와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행사는 '친교와 나눔의 경제(EoC)의 목소리들', '우리 땅의 재생', '로컬 경험들을 통한 재생', 'EoC 내에서의 기업가 정신의 여정', 그리고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 주는 서약과 소명' 등 총 8부의 주제로 구성되어 이틀간 밀도 있게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각국의 실천 사례를 공유하고, 단순한 이윤 추구를 넘어 경제 체제 전반을 재생(Regeneration)시킬 방안을 논의했다.


"상처를 치유하는 자원은 상처 그 자체 안에 있습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이끈 EoC 국제위원회의 공동 대표 이사야스 에르난도(Isaías Hernando)는 기조 발언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상처와 이를 치유하기 위한 EoC의 역할을 강하게 역설했다.


재생의 의미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EoC 국제위원회 공동대표 이사야스 에르난도(가운데), 사진=경동현
재생의 의미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EoC 국제위원회 공동대표 이사야스 에르난도(가운데), 사진=경동현

그는 "상처가 나면 즉시 혈소판이 피를 멈추고 백혈구가 감염을 막듯, 결국 상처는 안에서부터 새살이 돋아나야 치유된다"며,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실수는 물질적 빈곤이나 환경 위기를 오직 '돈'이라는 외부적 수단으로만 해결하려 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군사 분쟁과 생태계 파괴, 끝없는 탐욕과 불평등으로 인류가 피를 흘리고 있는 지금, 미래를 두려움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치유할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친교와 나눔(Communion)'이라는 것이다.


이사야스 대표는 이어 양자 역학의 '양자 얽힘'을 비유로 들며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친교를 경험할 때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관계적 재화(Relational Goods)'가 생겨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류의 미래는 약육강식이 아니라 협력과 연대에 있으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임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선언했다.


EoC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 성심당과 볼카데로의 증언



그렇다면 이 '친교'의 경제학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 현장에서 발표된 한국의 성심당 사례와 아르헨티나의 디마코(DIMACO)-볼카데로 연대 사례는 EoC가 현대 경제에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를 선명히 보여주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EoC 기업 성심당은 1956년 천막 찐빵집에서 출발해 현재 1600명의 직원을 품은 거대 로컬 기업으로 성장했다. 성심당의 놀라운 점은 IMF 외환위기나 대형 화재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오히려 지역사회 및 직원들과 고통을 나누며 재기했다는 것이다. 성심당의 성장은 단순한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위기 때마다 되돌아온 '관계의 축적'이었으며, 수익을 사회에 환원(지난해 16억 원)하며 부유함이란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빚어지는 것임을 증명했다.


유튜브 영상, EoC35주년 행사에서 발언하는 김미진 대표와 꼴베, 솔레가 성심당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남미 볼카데로 매립지의 증언은 가장 가난한 이들 역시 사회에 기여하는 동등한 주체임을 일깨워주었다. 디마코의 크리스티나와 볼카데로의 마을 이장 오레카(로베르토 고메스)는 매일 40대의 쓰레기 트럭이 들어오는 열악한 매립지의 현실과, 8살 소년 치차가 트럭 바퀴에 깔려 목숨을 잃은 비극적인 일상을 덤덤히 전했다. 그러나 디마코는 이들에게 일방적인 자선을 베풀지 않았다. 벽돌 쌓기 교육을 통해 주민 스스로 화장실과 공동체 센터를 짓게 하여 존엄을 회복시켰다. 나아가 크리스티나는 최근 정부가 환경을 이유로 매립지 폐쇄를 추진하는 것을 두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50년 넘게 이 막대한 쓰레기들을 맨손으로 분리해 환경 파괴를 막아낸 이들의 노고에 우리 사회 전체가 감사의 빚을 갚아야 한다"고 외쳐 큰 울림을 주었다. 돈이 많든 적든, 모든 인간은 타인과 사회를 향해 내어줄 무언가를 품고 있으며, EoC는 이들의 가치를 복원하고 연결하기 위해 존재함을 보여준 것이다.


EoC35주년 행사에서 발언하는 볼카데로의 마을 이장 오레카(로베르토 고메스)와 건축자재유통기업 디마코의 크리스티나가 무상성에 기초한 기업과 마을의 연대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경동현
EoC35주년 행사에서 발언하는 볼카데로의 마을 이장 오레카(로베르토 고메스)와 건축자재유통기업 디마코의 크리스티나가 무상성에 기초한 기업과 마을의 연대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경동현

"당신의 소명에 생명을 불어넣으십시오"


행사의 마지막 날인 30일, 참가자들은 '소명(Vocación)으로서의 EoC'를 주제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이사야스 대표는 "소명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만남, 나의 기쁨과 아픔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며, "불의를 보고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을 해결할 자원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루과이 시인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의 시를 인용하며 "당신의 꿈에 생명을 불어넣어라. 눈을 감고 꿈을 깨우며 살아가는 순간들을 발견하라"고 참가자들에게 호소했다.


이틀간의 뜨거웠던 연대의 장은 오프라인 참석자와 글로벌 줌(Zoom) 참석자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 주는 서약(Un Patto che ci unisce)'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서약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EoC 35주년 행사에 참가한 참가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무상성에 기반한 친교와 나눔의 체험, 참가자 전체 모임에서 올라온 지역별 참가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참가자 각자는 어떤 삶의 방식을 따를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이 삶의 자리에서 살아 갈, 일상의 작은 실천들이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직장에서의 작은 결정 속에서 '모두를 위한 경제'의 실천가가 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경제 EoC는 기업의 경영 이론이나 대안 경제 모델로 규정될 수 없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참가자들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삶 속에서 나누는 문화를 실천하기로 다짐했다. 이 따뜻한 혁명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이제 당신 차례다. EoC 디지털 허브 사이트(https://www.globaledc.org/)의 'Common Pact(공동의 서약)'에 접속해 보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일상 속에서 타인과 지구를 향한 '친교'의 발걸음을 내디딜 당신의 소명이 지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EoC 35주년 행사에 참가한 한국 참가자들, 사진=한국EoC
EoC 35주년 행사에 참가한 한국 참가자들, 사진=한국EoC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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